아들과 면접 동행

by 수더분한 버마재비

아들의 면접장, 혼자 1층 로비 카페에 앉아 망고스무디를 마셨다. 두세 시간 걸릴 것이라며 친구라도 만나고 있는 게 나을 것이라는 아들의 말에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했지만 친구는 공방에 가 있었다. 가져간 책을 읽고 앉아있기에는 의자가 너무 딱딱해서 카페를 나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양반자세로 앉았다. 뒤 유리벽에 몸을 기대고 책을 보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시간을 메우느라 몸부림을 쳤다. 면접이 모두 끝날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 면접장소인 2층으로 올라갔다. 가까이 가지 못하고 에둘러 주변을 서성이다 갤러리 '화해'와 '인동초 책마당'을 만났다. 마침 화해 갤러리에서는 사라져 가는 광천동 시민아파트 스케치를 전시하고 있었다. 뒷짐을 진채 스케치 후 엷은 수채화 물감을 바른 그림들을 보노라니 아주 오래전 살았음직한 이들의 발자국과 목소리, 그리고 해 질 녘 밥냄새가 퍼져 나오는 듯했다. 화해 갤러리 옆,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인동초 책마당에는 폭신한 등받이가 있었다. 갤러리와 책마당 입구에서 기다리다 들어가 앉았다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면접을 마친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은 두 번 모두 2층 면접장을 벗어난 1층 출구 앞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빨리 면접장을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면접장에서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는 동안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안 될 것 같아라고 단칼에 내 기대를 잘라버리기도 했고, 객관적으로 잘 보았으면 나를 뽑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기도 해서 나로서는 녀석의 면접이 잘 이루어진 것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녀석을 터미널에 내려주고 올라오는 길, 왼쪽으로 기울어가는 햇살이 뜨겁게 팔뚝을 간질였지만 에어컨 속에 몸을 담그고 있어선지 바깥세상과 안은 별개의 시간인 듯 흘렀다. 친정 가는 길이기도 해서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달리던 그 길을 1시간 40분 정도 혼자 달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를 만났다. 노란 햇살을 입은 푸른 은행나무 아래, 철제의자에 앉아계시던 아버지는 건물에서 나오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털고 일어났다. 아버지의 눈가에 오달진 주름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30여 년 전 10월, 스물을 훌쩍 넘긴 딸의 발령장 받는 길에 동행했다. 전날 저녁, 아버지는 '내가 같이 갈끄나?'하고 넌지시 물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처음 버스를 타고 가는 막내딸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에게 내가 발령받는 그 지역은 소 팔러 간 곳이었고, 엄마에게는 삼을 사거나 삼베를 팔러 간 곳이었다. 당신이 막내딸보다 발령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 곳은 유명한 우시장이 있어 아무래도 좋은 소를 고를 확률이 높고, 좋은 삼도 많이 나고 삼베 장사치도 많이 오는 곳이어서 한필이라도 제 값을 받기 좋은 곳이며, 이웃집 누구네 오래비댁이 거기서 시집온 사람이라거나 그 정도였다.(엄마와 아버지의 배경지식만으로 소와 삼베만을 알고 간 나는 결국 사무실 앞으로 지나는 이차선 도로 코앞이 바다인 마을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낯선 직장생활에 대한 긴장 덩어리와 약간의 들뜨고 두근거리는 마음이 덜커덩거리는 버스 안에서 뒤범벅되었다. 마을 앞 도로에서 출발한 버스는 버스 한 대만 지날 수 있는 길을 달려 산골짜기까지 들어갔다 다시 나왔고, 세 개 면을 지나 읍에 위치한 군청 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나와 나란히 앉아있던 아버지는 내릴 즈음에는 버스기사 뒷자리에 가 있었고, 일어나 내게 내리라고 손짓을 했다. 기사아저씨는 공무원 따님을 두셔서 좋으시겠다며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와 함께 내 얼굴을 룸미러로 훔쳐보았다.


발령장을 받고 정문을 향해 건물에서 나오는 길, 아버지는 은행나무 그늘 아래 놓은 철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경비아저씨와 인사를 나눴다. 기다리는 사이 내 이력을 알게 됐음이 분명한 경비아저씨에게 아버지는 우리 딸이라고 가리켰고, 얼결에 나는 인사를 했다. 건물에서 함께 빠져나오던 동기들이 아버지와 함께 온 나를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때 여자 동기들 중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다. 나중에 친해진 동기들은 아버지와 함께 온 내 모습이 웃겼다고 이야기했다. 돌아오는 길, 대단한 일이라도 하고 오는 딸을 보듯이 아버지는 위 상사들은 어떻더냐, 인사는 잘했냐, 좀 전에 본 애들은 고향이 어디더냐 등등 물었지만 나는 대충 둘러댔다. 읍내에서 깊숙이 들어간 바닷가에 배정된 것을 안 아버지는 그때서야 집안 대소가중 누가 도청에 있는데 미리 말해볼걸 그랬다고 말했다. 하지만 합격자 발표를 들었을 때부터 들어온 말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흘려들었다.


오래된 기억은 시간을 먹고 잊힌다. 굽이굽이 시간 모래 속에 파묻혀버린다. 가끔 무의식에 엉겨 붙어있었던지 꿈이라도 꾸는 날에는 하루 중 반나절 정도는 사막 바람에 드러난 작은 조각을 붙잡고 잠시 그리워하거나 다시 미워해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짧은 떠올려봄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꿈도 아닌 현실, 당신이 서있던 그 자리에 내가 와 있다는 것을 흠칫 느낄 때, 당신의 눈빛과 손짓은 내게 온다.


이주에 걸쳐 아들 면접장에 따라갔다. 아들은 대전에서 청년취업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간간이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이다. 기대가 부담스러웠는지 서류심사와 직업능력기초평가를 통과하고 나서야 광주 면접 일정이 잡혔다고 말했다.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은 나는 어떤 교통수단을 통해 다녀올 것인지 궁금해했지만 아들은 느긋하게 다녀올 계획을 생각 중이라 했다. 면접전날 저녁, 집에 온 아들은 다음 날 광주에서 면접을 마치고 다시 대전으로 올라가야 한다며 내가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아들의 은근한 요청에 덥석 손을 잡았다. 광주 면접장으로 데려가서 올라올 때는 대전행 버스를 탈 수 있도록 광주터미널에 내려주고 나만 집으로 올라오면 되는 것이었다. 집으로 함께 올라와 대전행 버스를 타면 좋으련만 군산에서 대전행 버스는 세시 반이 막차였고 그 시간은 우리가 아직 광주에 있을 시간이었다.


바로 대전에서 광주로 왕복하면 될 일이었지만 굳이 집에 들러야 할 이유는 양복 때문이었다. 양복을 장만하자고 할 때마다 '굳이?'라는 말로 지나쳐버리던 아들은 이번에도 친구양복을 빌렸다. 아들의 친구도 면접 보느라 딱 한번 입었다는 양복은 춘추복이어서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 입고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양복이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광주는 내 고향과 가까운 도시였다. 그리고 또 이십 대 초반 변두리에서 자취를 했고, 중앙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오월이면 걸어서 천변을 헤맸고 또... 광주는 정작 출세한 친구보다 더 거들먹거리는 아이처럼 '역시 광주여!'라는 말로 불려질 때마다 나를 으쓱거리게 하는 도시였다.


군산에서 광주까지 한 시간 반여를 달리는 동안 아들은 출력해 온 A4용지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혼자 옹알이를 하듯 면접준비를 했고, 가끔 내가 쏟아내는 광주 이야기를 아하 정도의 가벼운 추임새로 받아주었다. 면접장 주차장 차 안에서 양복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온 아들의 어깨와 등뒤를 털어주었다. 광주를 떠나온 지 30년이 넘어 생경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엄마의 오래된 익숙함이 아들의 면접장에서 경직된 어깨와 등을 풀어주었으면 했다. 이십 대 중반의 아들 면접장을 따라온 엄마는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주차장 한 칸 너머 부부가 문을 열고 나와 한참을 서 있었다. 조금 있으니 양복을 이제 막 갈아입은 듯한 아들이 차 안에서 나왔다. 그 부부와 아들이 면접장이 있는 건물까지 우리 보다 조금 앞서 걸었다.


아버지는 은행나무 아래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아들 면접장에서 나는 30여 년 전 그 자리에 서있던 아버지를 만났다. 며칠 전 흑백사진 속 엄마와 아버지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사진을 들여다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함께 사진을 보던 엄마는 사진 뒤쪽에 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여수 오동도였다고 기억했다. 마소재의 반팔 셔츠를 입고, 양복바지를 입은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분명 엄마는 내 평생 아버지 바지 줄이느라 볼일을 못 본다고 툴툴거리며, 시장에서 사 온 바짓가랑이를 자르고 재봉틀에 박음질로 야무지게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딸과 나는 그 눈웃음을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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