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 주먹보다 큰 대봉 감이 두 박스 올라왔다. 두 번째였다. 한 박스에 오육십 개 정도 담겨있는 것으로 보아 100개가 넘는다. 어떻게 이 양을 소화할까 고민하다 시누이에게 전화를 했다. 반갑게도 앉은자리에서 열개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바로 남도에서 올라온 한 박스를 경기도로 올려 보냈다.
10월에 먼저 올라온 감 중 절반은 싱크대 위 한쪽구석에서 감식초가 돼 가고 있다. 물론 감식초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둘째 딸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와 맘이 바쁘던 언니는 아직 첫서리도 내리지 않았는데 붉어지는 감이 걱정스러워 호다닥 따서 우리 집으로 부쳐버렸다. 감나무를 심은 주인인 엄마가 우리 집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덜컥 두 박스나 받게 된 나는 그날 저녁 바로 감을 깎아 네 조각을 내고 말릴준비를 했다. 작년에도 쉰 개 정도 감말랭이를 만들어 겨우내 엄마 심심풀이 간식을 했었다. 나머지는 여기저기 그동안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과 나눔으로 해결했다. 처음 며칠은 깎고 잘라낸 단면이 꾸덕하게 잘 말라갔다. 그런데 볕은 따스했고 바람마저 훈훈한 시월이었다. 새콤한 맛이 올라온 감말랭이 한 두 조각에서 초파리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공력이 아까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엄마는 몹시 애달파했다. 파란 덕장에서 쏟아내 플라스틱 통에 담은 후 뚜껑을 닫아버렸다. 그렇게 첫 번째 감말랭이는 식초가 돼 가고 있다.
1월에 느그 이모 시상 떴다고 가보고 안 가봤당게...
봄 여름 가을을 아파트 안에서 벗어나질 못한 엄마는 택배가 물어온 두 번째 감말랭이를 넘겨다 본다. 허리에도 걸음걸이에도 보조기의 도움을 받은 채 베란다에서 물기를 걷어내고 갈색빛으로 여물어가는 고향집 가을을 허기진 얼굴로 바라본다.
팔월 초, 화장실에서 나오다 주저앉은 엄마는 흉추 12번 압박골절로 세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보조기라 불리는 갑옷을 입고 계신다. 압박골절 후 두 달이 다 되어갈 즈음, 허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고 할만하자 새벽에 화장실 가려 일어나시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을 못 다물만큼 아프시다고 해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다녀왔다. 다행히 CT상 별 문제는 없어 진통제를 맞고 돌아왔지만, 엄마의 뼈는 늘 아프다.
골절이 있기 전에도 만성통증으로 시달렸던 엄마의 이마에 쌓이는 고통을 볼 때마다 애써 무덤덤함으로 시간을 흘려보내지만 그 모습이 내 얼굴로 옮겨온다는 것을 안다. 엄마 얼굴에 아픔이 적힐 때마다 내 얼굴은 표정을 묻어버린다. 엄마의 등 뒤에서.
기억하는 한 세 번째 압박골절이었다. 팔월초 엄마의 척추 압박골절은 덥고 습한 여름을 더욱 눅눅하게 만들었다.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등뒤를 보이듯 엄마의 허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되기를 바라보지만 거북등껍질 같은 보조기를 차기 위해 몸을 일으킬 때마다 아프다는 신음소리는 사라질 줄 모른다. 한 달여 반복되는 아프다는 소리에 이제 무신경해진 나는 아무 말없이 서너 시간마다 화장실을 함께 들어간다. 압박골절로 우리 집에 오셨다가 거의 나았다고 여겨질 즈음 고관절 골절로 다시 눌러앉아버렸던 것이 4년 전 일이었다.(병원진료받으면서야 알았다. 벌써 4년이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무덤덤하다. 그 안에서 엄마를 따라 맑았다가 흐렸다가 오락가락한다.
느그들이라도 먹으라고 심어놓은 것이어야...
엄마는 들여다보던 베란다에서 방향을 틀어 소파로 걸어오며 아버지를 불러온다.
뭐헌다냐? 소리가 안 난다!
왼손으로 나락모가지 서너 줌을 잡고 오른손으로 거의 한 줌인 듯 싸악 소리 나는 날렵한 낫질을 하시던 아버지는 양쪽으로 늘어선 언니와 동생들을 바라보며 웃으셨다.
오메, 벌쌔보 거그까지 가부렀냐?
옆에 선 언니와 함께 이쪽저쪽을 베어내기 싫었던 나는 혼자 굴을 뚫고 들어가 앞쪽에서 뒤돌아서서 아버지를 보고 어깨를 폈다. 아버지와 엄마 뒤로 큰 둥치의 볏단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언니와 동생들 그리고 내 뒤로 올망졸망한 볏단이 삐뚤빼뚤 드러누워 있었다.
삐득삐득 말랐냐?
어느 한 해는 그랬다냐 안?
'안'하고 끝말을 올리며 엄마 이야기는 시작된다. '들어보지 않을래?'하고 말끝을 올린 것 치고는 눈 맞춤도 없이 앞을 바라보며 술술 이야기기 풀린다. 아삼아삼한 기억은 대봉 조각을 타고 아랫녘 고향을 향해 내달린다.
엄마는 모롱지를 지나 신작로를 타고 걸어 왼쪽으로 내려가 중뫼논가에 심어놓은 대봉가지를 만지고, 다시 오른쪽 토골로 올라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누워계시는 산소에 들러 동그마한 봉분 위에 하얗게 꽃을 피운 삐비 꽃대를 뽑아내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 앉은 아버지 산소에 올라 청석강을 내려다보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엄마를 따라 올라온 대봉이 베란다에서 익어간다. 베자민 고무나무와 동양란 그리고 로즈메리와 작은 염좌 화분이 늘비하게 앉아있는 베란다에 삼단 생선덕장이 붉게 읽은 감조각을 품은 채 빨랫줄에 매달려 있다. 낚시를 해서 생선을 그득하게 말려보겠다며 동생이 들여놓은 생선덕장에 대신 감조각이 들어갔다. 다 담지 못한 감조각은 초록빛 채반 위에서 햇빛을 먹었다. 눈꼬리를 쭈욱 찢은 새침한 바람은 저녁에도 들어와 단맛을 올렸다.
시골 처마밑에 대롱대롱 매달린 곶감을 흉내 내려 욕심을 부리면 다시 식초를 담아야 한다. 해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 채반을 옮길 때마다 결대로 찢어 엄마와 맛을 보았다. 엄마는 속살이 아직 촉촉하지만 단맛이 출렁이는 것을 확인하고 하루 더 말려 거둬들이라고 했다. 고향집 처마에 내려앉은 햇볕과 사방의 산과 들에서 달려오던 바람 대신, 베란다 너머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이는 햇살과 바람의 손을 덥석 잡아 들여놓고 엄마와 나는 그렇게 가을을 지었다.
드디어 스무 조각씩 넣어 지퍼락에 담아 갈무리를 했다. 채반에 모두 담아 엄마가 볼 수 있도록 거실에 앉아 가을을 거둬들였다. 아파트 작은 마당, 베란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