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밭에 콩을 아주 몰래 심었어요

쉿, 새가 들어요.

by 수더분한 버마재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침대에서 윗몸을 일으키고 바닥으로 다리를 내리는 이 행위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두 다리는 뜨겁게 얼어버린 듯한 통나무 같다. 구부리려 힘을 줄 때마다 파도가 일듯 통증이 번졌다. 아직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아픔이다. 겨우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끙 소리가 절로 난다. 엄마는 거실소파에 앉기 위해 뻣뻣한 걸음걸이로 얼굴을 구긴 채 겨우 엉덩이를 앉히는 모습을 보며 딸보다 걱정이 더 많다. 우습게도 이 모든 것이 감자밭에 콩을 몰래 심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아침 일찍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니 오늘 당장 감자를 캐야겠다는 것이었다. 다음 주로 잡혀있던 일정이었지만 날씨를 이길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엄마는 당신 집에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방을 챙기고, 멀미약까지 준비해 놓은 채 오전일을 마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부안 개암사 주변 산행을 다녀온 때문인지 종아리는 작은 모래주머니를 채워 놓은 듯 묵직했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감자를 캐기 위해 출발했다.

두 시간여를 달려 친정마을에 도착했다. 몇 년 전 고향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언니네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수다를 떨며 볕이 시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햇살은 좀처럼 누그러질 기세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더위를 무릅쓰고 세시쯤 감자밭으로 갔다. 차에서 장화를 꺼내 신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목에 수건을 두른 다음 엉덩이에 동그란 방석까지 매달았다. 완벽한 착장이었다.

"언니, 호미는?"

"그럼 그렇지! 너도 나도 어설픈 농부다. 엄마가 챙겼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언니는 밭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정자에 가더니 호미 두 개를 빌려왔다.

"풀멘 다고 같는디 호미를 안 갖고 나간 늙은 나허고 똑같네. 그럴 수도 있제!"

정자 그늘에 앉아 쉬시던 동네 어르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며 언니는 웃었다.

언니는 감자대를 뽑고, 비닐을 벗기고, 나는 감자를 캐기 시작했다. 흙이 부들부들해서 호미로 양옆을 긁어주니 뽀얀 감자알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이 오달진 맛을 보려고 두 시간을 달려온 것이다. 고랑에 수북이 쌓이는 감자를 뒤로한 채 열심히 흙속에서 감자알을 주어냈다. 힘들어지려고 하는 순간, 퇴근한 형부가 왔다. 캔 감자를 박스에 주어 담고 콩감자도 조림용으로 따로 담아 트럭에 실린 박스를 보니 맘이 그득했다. 일곱 시도 안되어 마무리가 되었다. 감자 한 바구니를 들고 정자에 가서 호미를 돌려드리는 것으로 감자 캐기 일정이 끝났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무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자장가 삼아 시원한 이불을 다리사이에 끼고 뒤척거려 가며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감자 몇 박스 싣고 올라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감자 캐낸 자리에 바로 콩을 심으면 좋은디... 사흘만 되면 나부러야... 내일부터 비가 온담서야..."

저녁을 드시며 엄마는 누가 듣거나 말거나 말씀하신다. 상대가 홀라당 쉽게 넘어가는 타입이라는 것을 엄마는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작년에도 콩을 심을까 말까 하다 뒤늦게 심어 밭이 놀고 있다며 애를 태우던 엄마는 당신 눈으로 콩 심는 모습까지 보고 싶은 것이다. 몇 년 전 한번 심었던 기억이 있는 듯 없는듯한 나는 덜컥 언니에게 전화를 하고 말았다. 혼자 심어야 할 아득한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은 언니는 얼른 내일 다섯 시 반에 일어나 밭에 가자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일 콩밭에 가거든 떠들지 말고 조용히 심어라잉!"

"왜?"

"새들이 다 듣고 콩 빼먹어불믄 어쩔 것이냐? 귀신같이 알아 묵고 빼묵어분디 살째기 심고 오란 말이여."

큰일 났다. 엄마가 이상하다. 하지만 엄마 얼굴이 너무 진지하다. 감자 한 바구니 들고 찾아가 보았던 뒷집 할머니 모습이 겹쳤다.

"망구탱이가 더 놀다가랑께 새본다고 안 가부냐? 텃밭에 뿌려놓은 콩을 새가 싹 다 빼묵어분께 지켜야 쓴다고... 엉뎅이 좀 붙이고 나랑 이약이약 했으면 좋건는디 망헐놈의 망구탱이가 금세 가불드라고..."

해 질 녘, 뒷집 할머니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진심 텃밭을 지키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날씨를 검색해 보니 오전 내내 비가 올 예정이었다. 망설이던 세 모녀는 미루지 말고 그냥 해치우자는 심정으로 감자밭으로 갔다. 밭 옆으로 난 좁은 길에 주차를 했다. 엄마는 차 안에 앉아 밭에서 일하는 딸들을 훤히 내다보고 감독을 했다. 먼저 오른손에 쥔 호미로 땅을 콕 찍은 다음 왼손에 쥐고 있는 서너 알의 콩을 흘려 넣고 흙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다음 콩을 심어야 하는지는 모녀간에 질문과 답이 오가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발을 넓게 벌리고 한 고랑씩 잡고 선채 콩을 심기 시작했다. 이슬비는 그 칠 생각이 없었다. 감자밭이었던 열고랑 중 여섯 고랑을 심을 때쯤은 손에 쥔 콩이 불어 쪼글거릴 정도였다. 나머지 네고랑은 서리태 모종을 길러 옮겨 심을 계획이라는 언니의 말이 너무도 고마웠다. 비마저 내리는 이른 아침, 다행히 지켜보는 새는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들키지 않고 몰래 콩심기에 성공했다며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이틀이 지난 아침,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난간을 붙잡고 겨우 계단을 내려갔다. 언니는 몇 년 동안 고사리를 끊고 밤을 줍느라 시골살이에 익숙해진 탓인지 나처럼 엄살을 부리진 않는다. 사나흘동안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듯한 통증으로 힘들었지만 감자를 캐는 그 오달진 손맛을 본 것만으로 충분했다. 덤으로 새들 모르게 조용히 콩을 심으라던 엄마의 진지한 얼굴과 툇마루에 앉아 해질녘까지 콩밭을 지키는 아흔을 넘긴 뒷집할머니의 마음을 보았으니 그 여운이 오래갈듯하다.


비가 온다. 저 빗물을 흠뻑 먹고 새들 몰래 땅속에서 열심히 싹을 틔우는 콩밭을 생각하면 좋다. 일 년에 한두 번 어쩌다 농부, 그래서 좋다.

포슬포슬하게 익은 감자를 먹으며 물었다.

"엄마, 정말 새들이 콩심은 줄 알아?"

"그것들이 백여시여야. 호맹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다 안당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