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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싱 Mar 29. 2021

나는 분명 타락할 것이다

 나는 제법 인기 있는 녀석이었다. 지금은 그 인기가 다 어디로 증발했나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인기 있었던 적이 있었다. 적어도 초등학생 때는 말이다. 대구 구석진 곳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는 해외에서 살다 온 학생이 많지 않아서였는지, 내가 인기 있을 만한 구석이 있어서였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 지금 와서 그때를 돌아보면 사실 모르겠다. 아무튼 인기 있었다는 사실은 허언증은 아닐 것이다. 나는 반장과 부반장을 했었다!


 물론 그 사실이 인기를 온전히 변증하지는 않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넘어가자. 중고등학교를 해외에서 대부분 보내서 그 시절의 한국학교 학급 위원들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의 그 작은 권력은 나에게 참 달콤하였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나이에 권력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선생님의 권위를 대신해서 떠드는 애들 이름을 칠판에 적는 정도의 권력은 분명 있었다. 사실 그 떠드는 사람 이름에 적혀도 그때 당시에 무슨 벌을 받거나 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난다. 그래도 나는 곧잘 떠드는 아이들의 이름을 칠판에 삐뚤빼뚤하게 적고는 했는데 그러던 중 어떤 아이가 나에게 그때 유행하던 포켓몬(유희왕이었던 것도 같다) 카드를 한 장 주며 이름을 지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일단 받기는 했으니 이름을 지워주었는데, 받았으니 안 지워주면 그게 옳은 거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지웠는지, 권력의 맛에 취해서 지워주었는지 기억은 잘 안난다. 그렇게 한번 지워주니 이름이 적힌 친구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쥐어주며 이름을 지워 달라고 요구했고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두 칠판에서 지웠다.

 후에 선생님이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이 사실을 폭로했고, 나는 학급 임원 자리를 잃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더 크게 혼이 났던 기억이 난다.



 


“아오 진짜 정치인 자식들 뭐 정상인 놈이 없네. 나라를 위하는 놈이 한 명도 없어!”


정치인이나 권력자에 대한 욕은 이제 친구들과 만나면 반갑다고 하는 인사말이 되어 있다. 20대 초반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본인의 삶과 정치가 크게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 나가는 중인가 보다.


“아니, 내가 저맹키로 돈 있고 권력 있었으면, 욕심 안 부린다 진짜.”


내가 했던 말이다. 혹시나 내가 대구 출신이라서 특정 정당을 지지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틀린 생각이다. 나는 굉장히 진보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여하튼 늘 친구들과 만나면 사는 이야기, 정치 이야기, 여자 이야기 평범한 30대 남자가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또 힘내자는 말과 함께 침묵이 찾아오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야 근데 내가 군대 있을 때, 참 분대장 달았다고 별거 아닌 권력에 기분 좋더라. 나중에 그 견장 물려줘야 하는 때 기분이 참 이상하더라. 그게 뭐라고 맞제?”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늘 정의롭다고. 불의를 보면 화가 나고, 권력은 없어도 윤리는 안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그 짧은 친구의 말 한마디에 내 어린 시절 카드 받고 이름 지워주던 그때가 20년 만에 불현듯 떠올랐다. 그건 분명한 뇌물 수수가 아닌가?!(카드 가격이 싸서 김영란법은 적용 안 되겠지만) 비자금 조성하고, 뇌물 받고, 자기 자녀 부정입학하는 정치인들과 카드 받고 이름 지워주던 내가 스케일만 다르지 사실하는 짓은 크게 다르다 할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가 그저 이름 지워주는 것이어서 그것만 저질렀을 뿐, 나의 지경이 더 넓었다면 과연 이름만 지웠겠는가? 그렇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는가?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우리를 좀 돌아보는 시간을 잠깐은 가질 타이밍이다. 군대에서 계급이 올라가며 그 알량한 권력에 취해 후임 앞에서 어깨에 힘줘본 사람은 아니었나? 직장에서 연공이 쌓이며 본인의 인생관을 누군가에게 투영한 적은 없던가? 누구보다 조금이라도 무엇이라도 나은 알량한 권력에 본인도 모르게 작지만 부당한 무언가를 저지른 적은 없었나? 내가 권력자들과 재벌들을 손가락질하는 건, 나에게 손바닥 만한 권력도 없어서는 아닐까?


 내 꿈은 스타트업을 해서 나만의 사업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지금도 놓지 못하고 있는 꿈이기도 하다. 스타트업 생태계는 생각보다 그렇게 넓지 않아서, 조금만 둘러봐도 제법 잘 나간다는 사람들을 운 좋게도 만날 기회가 종종 있는데, 스타트업 대표를 하면서 나와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을 나는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는 이제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알 것이다. 그는 능력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으로도 유명한데, 사람을 다그치고 쉽게 자르고 이익을 위해선 이용해 먹는 이야기는 스타트업계에서는 미담일 지경이다. 일론 머스크는 어떤가? 그와 수년을 함께한 비서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 가고 돌아오니 해고당해 있었고 일론에게 해고 사유를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없어도 안 불편하더라’ 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아마존의 CEO인 제프 베조스는 인간인가 싶을 정도라 예로 들것도 없어 보인다. 소위 스타트업계의 대표들은 이런 성격과 결정이 성공의 덕목 중 하나라고 믿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처음부터 냉혈한이고, 사이코패스며,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살면서 위치에 놓이고, 권력이 주어지며, 누군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혹적이다. 그 별 것 아닌 칠판에 이름 적는 권력도 달콤한데,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나를 돌아보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고는 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사실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이제는 알겠다. ‘나는 절대 타락할 사람이 아니야!’ 보다 ‘나는 분명 타락할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제는 더 신뢰를 주게 된다. 본인의 반성은 본인이 그럴 수 있겠다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일수록, 본인이 권력의 맛에 물드는 것을 좀 더 오래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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