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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May 22. 2022

괜찮아야 할 것 같은 마음

나의 해방일지_첫번째 리스트

첫 직장이었던 병원에서 일한 지 2년이 넘어갈 때쯤 경영 상태가 나빠졌다. 환자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인원감축도 일어났고 그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이직하는 직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부서도 다섯 명에서 두 명까지 줄어들었다.

어느 날, 행정 업무를 맡은 사무장의 호출이 있었다.

나는 갈색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무장의 대각선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무장은 마른 두 손을 비비며 말을 시작했다. 고생 많았다, 병원 사정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겠지 하며 운을 띄우더니 결론은 더 이상 함께 하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병원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며 동료들이 그만두면서 너도 옮겨야지!라는 말을 들을 때부터 이직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변화가 쉽지 않은 나에게 첫 직장이라는 의미, 그리고 직장을 '그만둔다'라는 것에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 보니 먼저 권고사직을 받게 된 것이다. 언젠가 내 차례가 올 거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막상 듣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실컷 부려먹고 이렇게 쳐내는 나쁜 놈들이라며 욕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속상하다며 울지도 못했다. 오히려 "실업급여받으면서 쉴 거야, 나 괜찮아."라고 말했다.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잘하지 못했다. 환자가 너무 많아 엉덩이 붙일 틈이 없었어도 힘들다 말 못 했고, 환자가 전기치료기기를 나를 향해 집어던졌을 때도, 병원 경영 문제로 다른 재단으로 넘어간다는 말이 돌아도 티 내지 못했다.

집에 와서 말을 하면 내 걱정이 부모님 걱정이 될 텐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만 힘들면 되니까... 방긋방긋 웃으며 싹싹한 딸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건조하지만 감정의 동요 없이 그 자리에는 있었다.



안정적인 공무원도, 보너스가 빵빵하게 나오는 대기업 직장인도 아닌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빠, 아빠가 벌어온 빠듯한 월급으로 가족들 챙기느라 10원 한 장 허투루 쓰지 않았던 엄마. 두분 다 요령한번 없이 억울할 만큼 정직하게 살았음에도 따라온 대가는 그렇지 못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삶의 고단함은 곁에서 보는 나에게도 느껴질때가 있었다. 그래도 두 분은 늘 힘들지 않다 하셨었다. 사춘기 때는 그 모습이 보기 싫고, 부담스러워 벗어나고 싶을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말도 못하고 혼자 방에 들어와 입모양으로만 "악~~!!!!"하고 벙긋거릴 뿐 밖으로 소리 내지 못했다. 묵묵히 살아온 두 분에게 이런 마음을 보이는 것은 죄송했고, 그러려면 나라는 짐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늘 괜찮아 보여야 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갈등이 있어도,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내가 원하는 곳을 선택하지 못했어도,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었어도 말하지 않았다. 처음엔 정말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말하며 표현하지 않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감정도 무채색이 되었고, 겉으로 보이는 내 상황까지 남들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기 위해 신경 쓰게 되었다. 문제없이 사는것처럼 보이고 싶어 졌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몇 달 전 암 진단을 받고 너무 힘들고 무서운데 어디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 늘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을 텐데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픈 게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자꾸 숨기게 되더라. 암밍아웃 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밝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왜 내 병을 숨길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암수술을 하고 퇴원을 앞둔 마지막 밤도 그랬다. 몸살 기운이 느껴졌지만 간호해주러 왔던 이모가 걱정할까 봐 혼자 냉찜질을 하며 밤새 버텼다. 수술 후 일시적인 열감인지 염증 반응인지 모르겠지만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아침이 되어 혈압을 체크하러 온 당직 간호사가 컨디션 괜찮냐고 물었을 때도 괜찮다고 했다. 이모가 퇴원 준비도 할겸 얼굴이라도 닦아주려고 가까이 와서 몸을 만지더니 열감이 있다고 간호사를 호출했다. 체온을 재보았더니 열이 38.7... 양쪽에 얼음팩을 끼고 해열제를 먹고 간신히 체온을 내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 조차 괜찮다고 말하던 나...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거나 불편해하는 것을 보는 것이 어려워 나만 조금 참으면 되는데 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괜찮아요."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다. 부탁을 들어도 "저는 괜찮아요."라는 말과 함께 거절을 못하고, 힘드냐는 질문에도 "괜찮아요. 힘들지 않아요.", 오늘 기분 좋아?라는 질문에도 "괜찮아요."가 보통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중간 어디쯤에 머물러 나를 포장할 수 있는 말,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입 밖으로 꺼내기는 힘들어도 상황마다 하나씩 정리하며 괜찮다는 말에 감정의 이름을 붙이는 연습이 필요하지않을까.


'이만하면 괜찮다'라고 위로가 되는 날도 있고 정말 괜찮아서 다행인 날도 있지만 지금은 괜찮다는 마음 아니 괜찮아야 할 것 같은 마음에서 해방되고 싶다.

나에겐 괜찮지 않은 날이 남들에겐 아무 일이 아닐 수도 있고, 괜찮지 않은 날도 지나고 보면 괜찮았던 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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