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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Mar 29. 2023

어른 흉내

눈물을 참는 것이 진정한 어른일까?

언젠가부터 마음 편하게 우는 일이 어려워졌다.

우는 건 너무 감정적인 것 같고 나 때문에 상대방 기분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아 참으려 했다.

정말 슬픈 상황에도 눈물을 참는 것이 어른이라 생각했다.


"환자들이 선생님께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뭔가요?"
"울음요."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나는 모르는 사람 결혼식을 보고도 울 때가 많다. 내 결혼식에서 얼마나 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너무 울어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일까 봐 혼자서 결혼식을 상상하며 울지 않는 연습까지 해보곤 했다.

연습 덕분인지 부모님께 인사드릴때 외에 아주 잘 참을 수 있었다.(덕분에 화장 지워지지않고 예쁜 결혼 사진은 얻었다.)

그냥 좀 울어도 되는데 울지않으려 왜그렇게 신경을 썼는지 모르겠다.




나는 언제부터 눈물을 참으며 어른인 척했을까...

학창 시절에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던 것 같다. 눈이 퉁퉁 부어 방문을 열고 나와도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가주셨다.

그럼 그 후부터인가보다.

내가 기억하는 눈물을 참은 첫 어른흉내는 대학 진학이었던 것 같다.


이름 있는 명문대는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과는 갈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포기하고 취업이 잘 되는 학교로 진학했다.

원하는 과를 가 봤자 비전도 없는데 가서 뭐 하냐며 괜찮다고 말했는데 사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내가 괜찮지 않음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안 괜찮을 이유도 없었다.

첫 번째는 내 실력의 문제였고 두 번째는 원하는 것을 말 했으면 달라졌을 텐데 그 말에 책임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의 희생이라 생각했고 내 의지로 바뀌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생각으로 살아와서인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것이 콤플렉스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다면 달라졌을까? 아니면 아쉽고 속상하다고 펑펑 울기라도 했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을까?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강요받는다 생각했고, 나 혼자 눈치 보며 억울해했다. 주변 상황만 둘러보고 내 마음을 둘러보지 않아 여전히 내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있는 것이다.


한 번 시작된 어른 흉내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랬고 육아를 하는 지금도 그렇다.

"아무렇지 않아요, 저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나 자신이 꽤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키기 두려워했다.


물론 상처 입고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눈물 가득 연민을 느끼며
자신을 바라본 후에야 우리는
그러한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게 된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조차 내가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힘든 스스로를 알아채는 일이 마음을 돌보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없다면 혼자 이불 덮고 목이 쉴 때까지 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다.


한참이 지나도 아쉬움이 남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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