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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Sep 07. 2019

문학과 철학이 얼크러진 한국지성사2




한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1919.2.1.)가 발간되고 그 불만으로 『폐허』(1920.7.), 『백조』(1922.1.)가 등장하면서 3대 주요 문예동인지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지 문단의 윤곽이 마련된다.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발간으로 한국문학은 ‘예술작품’의 문턱에 발을 걸치게 된다. 그것은 『창조』의 자기 부과적인 선언에서부터 명시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 말을 드르시려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게서 무어슬 어드시려 하시닛가. 한낫 재미있는 니야기꺼림닛가? 저 통속 소설의 평범한 도덕임닛가? 우리는 귀한 예술의 장기를 가지고 저 언제던 얼굴을 찌푸리고 게신 도학선생의 대언자가 될 수는 업습니다. …… 우리는 다만 우리의 생각하고 고심하고 번민한 기록을 여러분께 보이는 바올시다.” 이러한 선언은 역사적 실재로서의 문단형성의 정치학을 암시한다. 이 선언은 1910년대 ‘지사’로서의 문인은 동인지 문단의 문인과 분절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사회적 실재로 전환하는 실천이다. 이렇게 볼 때 문단의 탄생은 연속성[무정형의 사람들]으로부터 사회적 불연속성[특정한 집합체]이 생산되고, 사회공간의 객관적 분리에 뿌리박고 있는 범주들이 실효성 있는 실체로 만들어지는, 다시 말해 집단형성에 내재하는 상징적 차원에 의해 사회적 경계선들이 구획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징권력의 우열관계는 다양한 경쟁적인 대안들에 맞서서, 넘어서 지배적인 ‘사회적 전망과 분리의 원리’로 서열을 부과하기 위한 투쟁을 수반하는 집단 형성 작업의 결과다.

하지만 개별적인 사건들로서의 역사가 집합적 단수로서의 역사로 옮겨가는 것은 가치의 전환이 일어난 후의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역사 서술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의도 또는 의지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기도 하다. 당대의 행위자들은 모순의 과잉결정이 강렬하게 표현되는 콩종크튀르(conjoncture, 정세) 아래에 있었다. 실패라는 잦은 경험을 통한 가르침이 혁명을 완성시킨다는 칸트의 금과옥조처럼 한국문학은 1910년대의 지식인 잡지와 20년대 동인지 실험(의 실패)을 거쳐 구성된 것이었음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1910년대 사회사상운동가로서의 지식인 이른바 ‘지사’와의 단절을 통과한 문단의 문인이 출현하고 나서 『폐허』, 『백조』 그리고 카프로 이어지는 복잡한 메커니즘은 ‘『창조』와 그 불만’이라는 역동적인 집단형성의 정치학을 거친 사회-상징적인 연금술(socio-symbolic alchemy)의 효과로서 재정위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동인지 문단은 1회적인 사건 즉 『창조』의 출현을 통해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실패에 대한 대체보충(supplément)을 통해서 구성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인지 문단 시기는 근대미의 발견과 성립에 관한 한, 일종의 혼돈기이면서 모색기였고 다양한 문학장르들의 미분화시기이면서 동시에 분화와 경계화의 시기였다. 김윤식은 『창조』는 근본적으로 장르 미분화 상태이긴 하나, 그중에서 소설 쪽이 조금 뚜렷한 것이었다고 관찰한 바 있다. 이는 ‘문학이라는 역어’가 소설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문학 개념은 근대 서양에서 중요하게 부각된 소설이 시, 극을 포괄하는 개념이었기에 ‘허구적, 상상적 문학이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당대인들이 감각하던 ‘한학적 전통의 문(文)이 도의 물질적 감각적 현시라는 함의’로부터 벗어난다. 문과 문학의 시차는 (장편)소설 중심의 문학에 도달하는 것을 부단히 지연시키는바 한국의 상징구조의 구성적 힘이 범주 현실화의 사회학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창조』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인 김억과 황석우는 이내 『폐허』 편집을 맡게 된다. 소설 중심성을 갖는 『창조』와 달리 시중심성을 갖는 『폐허』 (혹자는 최초의 시전문지의 위상을 『폐허』에 두려하기도 한다.)의 출현은 한국 문학사 100년을 어떤 세력 관계의 유동적인 흐름으로 이해하기에 족한 사건이다. 『폐허』 가 헤쳐모여 하면서 최초의 시전문지 『장미촌』(1921년 5월 24일)이 출현하고 이는 다시 『백조』를 매개한다. 공식적인 최초의 시전문지가 『장미촌』이라면 그 이전과 이후에 놓인 『폐허』 와 『백조』 역시 시 전문지에 준하는 시 중심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한국 문학사가 기형적이라는 의미일까?

소설 중심의 ‘리터러처Literature’ 개념의 언어횡단적 실천인 한국의 문학 담론이 전통적인 ‘문’이라는 강한 타자와 긴장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한국문학’이라는 역어는 서구에서 형성된 ‘문학’과 다른 특수한 문학, 복수의 문학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한국문학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서구적 근대문학이라는 역사적 실재가 필요불가결하다. 서구적 근대문학은 이미 우리 모두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서구적 근대문학과 그 이해는 한국문학을 사유하는 데 부적합 또는 불충분하다. 서구 근대문학은 한국문학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기입되어 왔지만 항상 동시에 변용과 괴리, 편차를 수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크라바르티는 “보편이란 것이 대단히 불안정한 형상”이며 형태를 갖춘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은 결코 보편적인 것 그 자체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다만 우리는 하나의 특수가 “보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순간 “보편의 윤곽을 얼핏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보편의 윤곽을 특수한 언어로 번역하게 되는데 이것은 “번역에 저항하는 요소들을 포함하기도 했던 개념-이미지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보편의 윤곽을 번역하는 일은 보편에 변형을 가하는 실천에 다름아닌바 서구적 근대문학의 번역인 한국문학은 그 자체로 보편으로서의 문학에 변화를 가하는 역사성을 갖는 것이다.

보편은 항상-이미 특수한 역사들에 의해 수정되고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문학이라는 역어’가 한국에서 수용되기 위해 도학의 세계가 탈구축되어야 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근대기에 도학은 도덕, 종교, 문학으로 탈구축되고 있는바 『창조』에 비친 문학장르들의 미분화는 근대적 문학 장르가 정착하지 못한 일시적인 미달태가 아니라 동아시아적 ‘문’이 서구적 문학과 만나는 순간의 역사성을 현시하는 보편의 한 측면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대인의 정신적 구성물이 물질적 속성으로 전환되는 과정 역시 이러한 천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겠다. 그럴 수 있다면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에 보인(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여진을 갖는) 시중심성에 대해서 나온 숱한 진단을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유종호가 잘 이야기해주었듯이 중국 전통에서 소설은 처음부터 어엿한 문학 반열에 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당시(唐詩)에서 진면목을 발휘한 시가 숭상 받고 있는 중국 전통에서는 처음부터 서정시 혹은 서경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었고 한국 전통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비록 시조나 가사가 한시에 비해 종속적 지위에 있었다 하더라도 소설에 비하면 그 사회적 문학적 지위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근대적 출판의 영세성 속에서 짤막한 서정시는 번역 시의 영향도 가세하여 처음부터 주류 장르의 하나로 출발하였다. 그러한 서정시의 주류성은 범세계적으로 시의 퇴조가 주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문학에서는 변경되지 않은 특성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근대문학 초창기의 해프닝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방정환 등이 주도한 순문예 잡지 <<신청년>>에 관계하던 최승일은 잡지 운영이 어려워지자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며 그 명분을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라 눙쳤다. 이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을 보자.

 

굳이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너무도 조르는 고로 먼저 발행한 잡지를 보자고 하여 결국 그 내용을 보니 공교롭게 ‘아!! 영숙씨!’ 등의 소설 대화가 있는 데로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이라고 했으니 점잖은 한시나 하다 못해 그럴 듯한 시조라도 한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과는 너무도 어그러진 까닭이었다.

‘글세 이 자식아, 어! 아! 하면 모두 문학이란 말이냐.’(이동희, 노상래 편, 『박영희 전집』 2 영남대 출판부, 1997)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시중심성을 갖는 시전문지 『장미촌』의 출현은 당대인의 정신적 구성물이 역사적 실재로 전환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당대의 ‘정세’ 아래에서 상징구조의 구성적 힘이 가한 압력, ‘『창조』와 그 불만’으로서 문단 형성의 정치학을 검토할 때 최초의 시전문지 『장미촌』은 ‘문’과 문학의 시차, 시와 문학의 시차 속에서 한국 문학을 사회적 실재로 탐구하기 위한 물적 토대로 정위될 수 있을 것이다.

 

3

 

‘문(文)’과 문학의 시차, 시와 문학의 시차로서 ‘『창조』와 그 불만’의 정신적 구성물에 물질적 속성을 부과하고 있는 최초의 시전문지 『장미촌』(발행인은 미국인 선교사 필링스, 한국 이름 변영서)은 1921년 5월 24일에 창간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 창간호뿐이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창간호를 통해 우리는 변영로, 황석우, 정태신, 신태악, 노자영, 박영희, 박종화,이훈, 오상순(‘동인의 말’에는 오상순이 ‘사고(事故)로 부득이 시를 싣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등의 동인과 외부 기고자 박인덕, 이홍 그리고 1920년대 발간된 시집의 4분의 1 이상의 인쇄를 책임졌던 인쇄인 노기정을 확인할 수 있다. 『장미촌』의 발행소로 되어 있는 “천연동 99번지”는 박영희의 집주소인데 실제로 박영희가 『장미촌』의 실제 편집을 담당했다고 한다.

『장미촌』 창간호가 발간되고 나자 기독교 청년회관에서는 시낭송회가 열려서 큰 흥행을 누렸다. 당시 상황이 박종화의 일기에 상세히 남아 있다.

 

“아직도 시라면 한시의 절구와 사율만을 시라 하고 자유시 같은 것은 일반 인사들의 안중에 없었던 때였다. 더구나 한시의 영시(詠詩)도 아니고 신시라는 것을 낭독한다고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 문 앞에 광고판을 세워놓았더니 호기심을 가지고 젊은 청년과 여학생이며 노인들이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때는 5월 하순경이 되고 보니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화창한 일기였다. 시간도 하오 7시를 택했으니 저녁밥을 먹고 나오기 좋은 때였다. 사람들은 장미촌이란 어휘에 구미가 동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시 묘령의 여류 박인덕이 신시를 낭독한다 하니 더 한층 흥미를 가지고 모였다.”

 

박종화의 일기에서도 ‘문학이라는 역어’는 ‘한시=신시=문학’이라는 연상작용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은 구연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장미촌』에 참여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창조』의 선언 즉 ‘지사’와의 단절이 번복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장미촌의 외부기고자만 보아도 초창기 기독교계통에서 여성운동을 했고, 유관순의 은사로 잘 알려져 있는 박인덕이 있다. 또 다른 외부기고자 이홍은 『장미촌』의 동인 정태신, 신태악, 이훈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 운동가였다.

이로서 우리는 1910년대 ‘지사’와 상징적 절연을 이룬 『창조』가 어떻게 실패하고 어떻게 대체보충되는지, 더 나아가 ‘문(文)과 문학의 시차’, 시와 문학의 시차를 ‘정세’ 아래에서 전개되는 문학이라는 보편성의 역사성으로 개괄해 보았다.

개별적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국 문학 100년사는 우리가 고착되어 있는 (보편적인) 역사의 진행을 중단시키는 동시에 역사 진행의 중단마저도 역사적 과정 속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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