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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Sep 07. 2019

만해가 동쪽으로 간 이유2


한용운의 선택-1903년 한용운은 왜 강원도로 발길을 돌렸나

 

한용운은 입산 직후 세계 여행을 떠나려 했던 경험을 「북대륙의 하룻밤」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그것이 나의 입산한 지 몇 해 안 되어서의 일인데, 나의 입산한 동기가 신앙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유벽한 설악산에 있은 지 멀지 아니하여 세간 번뇌에 구사되어 무전여행으로 세계 만유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한용운이 1903년에 서울로 가던 길을 돌려 강원도로 들어간 것은 “신앙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용운이 태어난 고향 충청도를 버리고 서울도 아닌 강원도로 걸어 들어간 선택은 특수한 경험구조를 배태한다. 이러한 선택은 이후 한용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근대는 “새로운 제도들이 출현하고, 그 제도들은 개인별로 신념, 규범, 정체성 등을 하나로 묶어서 제공한다. 겔렌은 이를 “이차적 제도”라고 불렀다. 이차적 제도는 개인이 너무 많은 선택에 시달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덕분에 현대인도 특별한 생각이 필요없는 자동적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런 제도는 전근대의 제도보다 약하다. 이 이차적 제도들 역시 주어지거나 당연시되는 게 아니라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용운이 충남 홍성의 고향을 떠나는 것은 ‘근대적 개인’이 거치게 되는 상징적 사건이지만, 2차적 제도로서 ‘제2의 고향’을 선택하는 일 역시 근대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한용운 세대가 기독교를 비롯한 신종교를 ‘제2의 고향’으로서 선택할 때 대개의 경우 자신의 고향과 단절하지는 않고 있는데 비해 (가령 윤치호와 안창호가 보여준 ‘지역주의’를 상기할 수 있다.) 한용운의 불교 선택은 고향과의 단절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변별성을 갖는다. 고향으로부터 분리된 한용운에게 ‘제2의 고향’은 ‘강원도-불교’인 것이다.

1903년경의 종교는 신앙 그 자체로 한정되지 않는 근대 문명의 힘을 지시하고 있었다. 한용운이 서울로 가는 도중에 자신의 무능력을 자각하고 강원도로 발길을 돌려 불교에 귀의하는 경로는 최린의 천도교 입교 경로와 비견된다. 서울로 올라가 황실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최린은 1908년에 일본에서 돌아오는데 황실이 입신양명의 제도적 힘을 잃게 되자 다시 천도교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최린이 한일합방을 계기로 천도교를 선택하는 것과 달리 한용운은 1903년에 이미 무력감에 빠져 불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고향과 가문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한용운이 전근대적인 정체성으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신종교로서 불교를 선택하는 데는 근대적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작동하는 것이다.

한용운의 ‘개인적 무력감’이 ‘강원도 불교’로 나아가게 했다는 점은 서북 지역의 ‘집단적 무력감’이 기독교로 나아가게 했다는 점과 비견할 만하다. 개신교는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 직후인 1885년 4월 5일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감리교와 장로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로 입국하면서 공식적으로 조선에 들어오는데, 관서지역의 개신교 선교활동은 1891년 입국한 모펫, 베어드, 맥쿤 등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1897년경 평양에 이주하면서 주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장로교 교인이 1898년 현재 5,950명인데 이는 한반도의 장로교 교인의 79.3%에 해당한다. 1895년에서 1898년의 3년 사이에 서북 지역 교회의 숫자가 약 1,000% 증가했으며, 같은 증가율을 이룩하는 데 서울은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신종교의 확산이 특정 지역성과 관련하여 논의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개화기에 근대 문명의 힘을 분유(分有)하는 개신교의 특권을 나눠 가지려 하는 다양한 신종교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와중에 강원도의 지역성에 기반한 강원도 불교의 역학은 주목할 만하다.

개신교 북감리교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이 1897년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조선의 사찰에 가보면 불교는 “과거의 것, 죽어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건물은 퇴락하고 더러우며, 몇 명 되지 않는 승려들은 무지하고 의욕이 없었다. 그는 “보통의 불교 승려가 보여주는 일반적인 무지, 특히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무지는 소름 끼칠 정도”라고 하였다. 스크랜튼은 잘 수리되고 “깨끗한” 건물에 백 명 이상의 지적이고 열정적인 신앙을 가진 승려가 있는 금강산 유점사를 방문하고 나서야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인상을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을 “대단한 기쁨”으로 여겼다. 유점사에서 그는 자기들의 종교에 충실한, 예의바르고 친절한 승려들과 그들이 집단으로 행하는 예불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목격한 사찰 가운데 유점사가 가장 가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스크랜튼이 보았던 유점사는 개화기 조선 불교의 현황에 대한 의미 있는 증언이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 속에서 개화기에 의미 있는 종교적 역량을 발휘하고 구심점이 되어줄 수 있는 잠재력은 강원도의 지역성 속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종교가 신문화운동의 주체로 떠오르는 시기 불교계는 대체로 기독교나 천도교에 비해 근대적 역량이 낮은 편이지만 지역별 편차에 따른 세밀한 접근을 할 때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강원도의 인문지리적인 특징과 강원도 불교의 사격(寺格)을 검토한 후 한용운의 수업시대를 강원도 불교의 근대 지향성과 관련지어 논의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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