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익균 Sep 06. 2019

만해가 동쪽으로 간 이유1


만해가 동쪽으로 간 이유1

 

   

 

한용운은 1903년 고향인 충청도를 떠나 서울로 가기 위해 서북쪽으로 걸어가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구부려 강원도에 들어서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났는가? 한용운의 사회문화적 위상을 염두에 둔다면 이 방향전환을 종교적 결단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용운 스스로 ‘신앙’만을 위해서 입산한 것은 아니었다고 회고하고 있는바 우리는 개화기의 한 지방 청년이 서울로 가던 발걸음을 돌리게 한 ‘강원도의 힘’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용운은 1897년 충청도 서해안에 있는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부락에서 한응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세대적으로 분류하면 한용운은 개항 이후 태어나서 갑오경장 이후 성장기를 보내낸 뒤 신종교를 매개로 하는 1기 신문화 운동의 주역이 되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1기 신문화 운동은 신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1905년 12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신교자강(信敎自强)’에 의하면 “국가의 재력과 병력이 비록 허약하나 자국의 종교와 자국의 역사를 능히 보존하면 독립정신이 전멸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국권을 회복하나니”라고 하여, 종교로써 독립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신종교의 활성화와 함께 등장한 종교입국론은 봉건적 사회통합의 이념으로 그 사명을 다한 유교를 대신하여 근대민족국가 차원의 새로운 종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민통합과 국권회복의 구심점을 마련하자는 논리였다. 1기 신문화 운동의 주축은 기독교, 천도교이지만 불교계의 물적 토대는 그동안 간과되고 있었다. 1기 신문화 운동의 주요 성과로 한용운의 『유심』은 불교계의 물적 토대가 뒷받침한 경우이다. 조선시대의 억불 정책에서 놓여난 지 얼마 안 된 불교계가 신문화 운동에 어떻게 동참하게 되는지 한용운은 잘 보여준다. 한용운이 개신교의 안창호나 천주교의 안중근, 천도교의 최린, 유교의 김창숙, 신채호 등과는 한 살이 많거나 적은 동년배라는 점에 주목할 때 불교계 신문화 운동의 주역으로서 한용운이 놓인 위치공간이 선명해진다. 한용운의 수업시대(1903~1909년)라는 문제계는 동아시아 불교의 근대적 재편이라는 큰 틀과 강원도라는 특수한 지역성에 의해 추동되는 근대 조선불교를 동시에 해명해 준다.

김광식은 한용운이 고향을 떠난 이유를 “자기 자신의 포부와 홍성이라는 지역사회와의 부조화”로 파악한다. 한용운이 8세 때 한용운의 아버지 한응준은 홍성의 아전 군속으로 취업하는데 1894년에는 동학군을 토벌하는 행목사가 된다. 한용운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서당을 중단하였고, 조혼을 통한 처가의 도움으로 홍성의 향교에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처가에 의지하는 일이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1894년의 동학혁명과 1896년 1월의 홍주의병 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면서 한용운은 1897년 19세에 집을 나가 방황한다. 3년간의 방황 이후 홍주의병 전쟁에서 부친과 형이 죽자 1900년경 한용운은 홍성으로 잠시 돌아오는데 당시 한용운의 아버지의 죽음은 관군과 의병 사이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듯하다. 홍성에서 한용운의 입지는 혼란스러웠고 조혼으로 인한 연상의 아내와의 관계도 정리가 안 되는 와중에 1903년(25세)에 결국 고향을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그해가 갑진년의 전해(1903)로 대세의 초석이 처음으로 기울기 시작하여서 서울서는 무슨 조약이 체결되어 뜻있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경성을 향하여 모여든다는 말이 들리었다. 그 때에 어찌 신문이나 우편이 있어서 알었으리만은 너무도 크게 국가의 대동맥이 움직여지는 판이 되어 소문은 바람을 타고 아침 저녁으로 팔도에 흩어지었다. 우리 홍주서도 정사에 분주하는 여러 선진자들은 이곳 저곳에 모여서 수군수군하는 법이 심상한 기세가 아니었다.

그래서 좌우간 이 모양으로 산속에 파묻힐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루는 담뱃대 하나만 들고 그야말로 폐포파립으로 나는 표연히 집을 나와 서울이 있다는 서북 방면을 향하여 도보하기 시작하였으니 부모에게 알린 바도 아니요, 노자도 일분 지닌 것이 없는 몸이메 한양을 가고나 말는지 심히 당황한 걸음이었으나 그 때는 어쩌지 태연하였다. 그래서 좌우간 길을 떠난 몸이메 해지기까지 자꾸 남들이 가르쳐 주는 서울길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였다.”

 

‘갑진년의 전해’ 즉 러일전쟁 직전의 비상한 시국을 한용운은 “여러 선진자들”의 수군대는 소리로 당면한다. 한용운의 출발은 동년배들과 비교할 때 명료해진다. 안창호는 1902년 9월에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신부 이혜련과 함께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과 하와이를 거쳐 그해 10월 캐나다 밴쿠버에 상륙하였다. 1907년 1월에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안창호는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다. 최린은 일본 망명중이던 박영효가 모의하던 ‘2차쿠데타’에 연루될 위험을 피해 1902년 3월에 일본 오오사카로 피신을 하였다가 돌아와 1903년 9월에는 ‘입신양명’하라는 부친의 권유를 따라 서울로 가서 1904년 10월에 황실유학특파원으로 일본에 도착한다. 한용운은 어린 시절 부친이 “역사상에 빛나는 의인 걸사의 언행을 가르쳐주시며 또한 세상의 형편, 국가사회의 일을 알아듣도록 타일러주셨다. 이러한 말씀을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이상한 불길이 일어”났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같은 해에 태어난 최린과 한용운은 서로 다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입신양명’을 위해 같은 해에 서울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해는 이미 기울고 발에서는 노독이 나고 배는 고파 오장이 주우리어 차마 촌보를 더 옮기어 드딜 수 없기에 길가에 있는 어떤 주막집에 들어가 팔벼게 베고 하룻밤 지내느라니 그제야 이번 걸음이 너무도 무모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큰뜻을 이룬다니 한학의 소양밖에 없는 내가 무슨 지식으로 큰 뜻을 이루나?(중략)

‘에라,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 하는 결론을 얻고 나는 그제는 서울 가던 길을 버리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에 이름 높은 도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산골길을 여러 날 패이어 그곳으로 갔었다.”

 

한용운은 밤을 새던 중에 문득 서울을 향한 발걸음에 의구심을 느낀다. 한용운은 어린 시절 읽은 <서상기>에서 인생의 무상을 떠올렸다고도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요인은 “이번 걸음이 너무도 무모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큰뜻을 이룬다니 한학의 소양밖에 없는 내가 무슨 지식으로 큰 뜻을 이루나?”라는 현실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턱대고 서울에 가는 대신 한용운은 ‘도사’를 찾아기로 한다. 이때 ‘도사’는 단순한 신앙의 지도자는 아닐 것이다. 서울에서 보장해주지 않는 현실적 힘, 문명으로 인도해줄 어떤 세력이 강원도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문학과 철학이 얼크러진 한국 지성사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