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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Sep 06. 2019

문학과 철학이 얼크러진 한국 지성사1

퇴근

문학과 철학이 얼크러진 한국 지성사1

이 책은 문학과 철학의 ‘분단체제’를 극복하여 한국 지성사의 대체보충(supplément)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근대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 지식의 영역과 취미의 영역을 분리하고 철학과 문학/미학이 지닌 각각의 자율성을 구별하는 데 있다. 피에르 마슈레는 “각자를 정의하는 각 장 속에 갇혀 그 각자의 한계를 고정시키는 문학과 철학의 대면은 결국 역사의 생산물”이며 이러한 구분으로부터 “결정론적 성질을 제거”하자고 한다. 따라서 문학과 철학을 각각의 실재로 간주하면서 철학의 입장에서 문학작품에 접근하는 태도인 ‘교훈적 도식’과 ‘해석학적 도식’도 거부한다. 그 대신 “문학과 철학의 뒤섞임”으로서의 ‘문학적 철학’이 요청되는 것이다.


교훈적 도식은 문학작품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의 진리의 사례를 발견하려는 태도 또는 문학작품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험하고 적용하는 사례를 발견하려는 태도이다. 해석학적 도식(혹은 낭만주의적 도식)은 문학을 진리가 드러나는 특권적인 장소로 간주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두 가지 도식은 문학과 철학이 처음부터 서로 다른 복수적인 위상에서 상호 간섭하는 혼합된 담론이라고 보는 관점에 서면 불필요해진다.


모든 위대한 작가는 문학과 철학의 조우를 경험하고 그 경험에 대해 남긴 ‘기록’ 즉 문학 텍스트를 생산한다. 문학과 철학의 조우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응축된 형태인 문학 텍스트를 낳는다. 첫째 문학가는 자신이 수용한 철학적 사유를 단순한 인용구 형태로 문학 텍스트의 표면에 문화적인 지시 사항으로 드러낸다. 둘째 철학적 논지를 인물의 묘사, 서사의 구축 등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셋째 문학 텍스트는 의사소통의 축에서 사변적인 내용을 수행적으로 발화하게 된다. 문학과 철학의 조우라는 사건을 통해서 탄생한 정신적 구성물은 물질적 속성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 세 층위로 응축된 문학 텍스트 또는 문학적 철학 텍스트를 낳는다.


문학과 철학의 조우가 기입된 문학 텍스트의 세 번째 층위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문학 텍스트는 이미지들과 서사 및 언표행위 도식들의 자유로운 유통을 통해 유희하듯이 자유롭게 진행된다. 문학 텍스트는 언어에 대한 언어의 비결속, 곧 우리가 말하는 것을, 우리가 말하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부터 끊임없이 분할하는 간극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문학 텍스트가 대상으로 삼는 이러한 간극은 모든 사유가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피에르 마슈레는 “말장난의 명상적 기능”이라고 부를 것이다. “말장난의 명상적 기능”을 생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셸 푸코의 문학론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은유원리에서의 반복은 담화의 형식과 어긋나는 반복, 담화의 통합체적 구성을 교란시키는 반복, 즉 내용과 형식의 괴리를 초래하는 반복인데 이러한 불일치의 근본적인 이유는 언어가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기호들로 이루어진 훨씬 일반적인 체계에 속한 하나의 기호체계라는 데 있다. 문학은 특정 사회, 특정 문화의 분리된 개별적 층위-기호학의 적어도 4가지 층위- 안에 주어지는 기호들의 수직적 재배치이다. 문학은 구어적 기호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소쉬르의 애너그램이나 초현실주의 실험, 언어학적 기호론의 층위에 있는 작품의 내적 구조의 의미, 언어학적 심층구조들과 관계하는 바르트적인 글쓰기의 의례, 마지막으로 시간을 초월한 깨달음을 낳는 자기-내포(auto-implication)적인 기호들을 가로지르는 놀이로부터 산출되는 하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련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서로의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도록 하는 조작을 통해 담론의 형식을 뒤바꾸어 놓는 문학적 작업은 말이 사물의 다른 얼굴로 나타나지 않고 그 자체 두 얼굴을 가진 현실이 되게 한다. 시인은 이 기호와 의미의 관계에 현기증나는 형식을 부여하여 언어의 사용을 그 한계에 치닿게끔 밀어붙이는 존재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항상 끊길 위험 속에 놓여 있고 급작스런 결합에 의해 옆길로 샐 가능성 위에서 진행된다. 왁자지껄한 이 향연으로서의 문학은 시니피에의 내용이 어떤 사물의 실제적 존재에 부합해야 하는 필연성 없이 시니피앙의 고유 논리 자체만으로도 시니피에의 내용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투명하게 보여 주는 장치인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문학적 철학은 철학의 맹목점을 철학 자신에게 드러내 주는 역할을 맡게 된다. 푸코는 사드를 통해서 ‘문학적 철학’ 개념을 선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드는 욕망을 진리의 절대권 아래 정돈시켰던 플라톤적 구축물을 욕망과 진리가 동일한 나선의 내부에 속해 있어 서로 맞부딪히고 서로에게 맞서는 하나의 놀이로 대체한 인물입니다.”


이 글은 문학적 철학이 한국 지성사의 예가 될 수 있는지 검토하기 위한 정지작업이 되기를 희망한다. 예란 본보기(paradigma)이며 어원적인 의미에서 ‘곁에서 보이기(paradeigma)’라고 할 수 있는바 자신의 고유한 기표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의 기의를 유예시키게 된다. 아감벤은 예가 일반적인 경우에 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로부터 배제되는 역설을 강조한 바 있다. 한국지성사의 예/예외로서 문학적 철학은 모순의 과잉결정이 강렬하게 표현되는 고유한 콩종크튀르(conjoncture, 정세) 아래에서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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