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속에서 만난 크리스티안 페촐트...

by 키고마

여름이 길어지니 늦여름이 남긴 흔적에서 아직 여름의 여운을 찾는다. 올여름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가 있었는데, 그만큼 진이 다 빠져버린 시간이었다. 뭔가 이 여름을 마무리할 만한 충전제가 필요했다.

라디오 PD의 눈에 ‘음악소설집’이라는 제목이 쏙 들어온 건 평범한 일이었다.


우리 삶의 장면 속엔 늘 음악이 있었다.

김애란×김연수×윤성희×은희경×편혜영과 함께하는 음악소설 앤솔러지

다섯 곡의 음악, 다섯 편의 이야기, 다섯 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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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문구가 작가 이름만큼이나 현란하다. 요즘엔 출판사의 기획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워낙 대단한 필력의 작가들이다 보니 단편을 읽는 시간이 마치 문예창작과 수업 과제를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음악도 각양각색이었다. 팝, 클래식, K팝까지 다양한 장르에 작가들이 꽂힌 이유도 각기 서로 다르다. 굳이 음악 소설이라고 불릴 이유가 있나 싶은 단편도 있었다. 출판사의 요청에 응했던 작가들이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자신에게는 어떤 말들을 해주었을지가 궁금해진다. 소설집의 뒷부분엔 부록처럼 작가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은희경 작가의 인터뷰 내용 중 유독 한 사람에게 관심이 갔다. 독일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 작가는 자신이 산만하고 잘 몰랐던 걸 깨치는 순간의 진취적 충일감 같은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설명하면서 비행기에서 본 <어파이어>라는 영화를 언급했다. <어파이어>는 베를린파(Berliner Schule) 1세대 감독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 감독의 영화다. 무조건반사처럼 감독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이런 하필 CGV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기획전이 시작된다는 기사가 떴다. 이런 행운이...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신작 영화 ‘미러 넘버 쓰리’ 개봉에 맞춰 기획된 것이었고, 페촐트 감독전은 과거에도 종종 기획된 바 있었다. 아무튼 근무 시간을 피해야 하고 드문 드문 배치된 영화 시간표를 찾아야 하고 어렵사리 영화 2편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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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파이어>는 제목 그대로 불같은 영화다. ‘불’은 청춘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시절의 자의식 과잉은 관계를 엇갈리게도 뒤틀리게도 한다. 존재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서툴게 사랑을 읊조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인양 비치기도 했다. 환갑을 넘긴 감독의 우화 같은 청춘 이야기가 매혹적이어서 오랜 여운이 남았다. 사랑에 빠지면 그 갈망으로 죽어버리는... 영화 속 여주인공이 읊조리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구절에 등장하는 아스라 종족이 된 것마냥...


날마다 아름다운 술탄의 딸은 서성거렸다,

저녁 무렵 하얀 물결 찰랑거리는 분수 주변을.

날마다 젊은 노예도 서 있었다,

저녁 무렵 하얀 물결 찰랑거리는 분수 주변에.

그의 모습은 나날이 창백해져 갔다.

어느 날 저녁 공주가 그에게 다가가 재빨리 물었다.

네 이름이 뭔지, 고향이 어딘지, 어느 종족인지 알고 싶구나!

그러자 노예는 말했다. 제 이름은 모하메드이고, 예멘에서 왔습니다.

제 혈통은 사랑하면 죽는다는 아스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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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본 영화는 <바바라>였다. 동독을 배경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지식인이 겪을만한 갈등과 혼란이 인공조명을 최소화한 아름다운 바닷가의 풍광과 바람과 뒤섞여 소용돌이친다.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지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시각이 반영된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안드레의 눈빛이 아직도 가슴에 사무치는 거 같다. 영화가 줄 수 있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내가 아직 많이 사랑하나 보다.

영화 <바바라>와 음악소설과의 연결성은 별로 없다.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음악가로서 인간적 고뇌를 겪었을 법한 쇼스타코비치 일생을 담은 줄리안 번즈의 <시대의 소음>이야말로 진정한 음악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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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 번즈는 20세기 대표적인 작곡가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를 스탈린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 흐루쇼프 체제 등 역사적 격동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양심과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일신의 영광과 안전을 위해 체제와 타협한 기회주의자라기보다는 치열한 내적 갈등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추구한 인물로 말이다. 물론 신뢰할만한 자료와 인터뷰를 근거로 했을 것이다. 사회주의를 예찬했던 당시 서구사회의 저명한 지식인, 예술인들을 향한 비난의 소리도 있었다. 작가는 말한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작가는 말한다. 늙어서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아이러니에 등을 돌리면 그것은 냉소주의로 굳어진다고. 그렇게 되면 그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냉소주의는 영혼을 잃은 아이러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