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자영업자로 15년째 소상공인으로 살고 있다. 남편과 매일 같이 출근하고,같이 점심을 먹고,같이 퇴근해서 아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이건 생각보다 보통일이 아니다. 팀워크가 좋아야 가능한 엄청난 일이다.
태아날 때부터 자영업자 부모를 둔 외동딸 아이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를 마치면 늘 가게로 하원했다. 좁은 가게 한 귀퉁이에서 작은 책상 하나 펼쳐 그림을 그리고 소꿉놀이를 하고 한글도 깨쳤다. 우린 일터에서 나름대로 잘 놀았다.아이는드문드문 있는 손님들에게 엄마를 잠시 양보하는 법을 깨우쳤다. 손님에게 현금을 받거나 카드 계산을 하고 금전등록기가 '따릉' 하고 열리는 소리가 많을수록 좋은 소리라는 것을 아이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넋을 놓고 있을 때면 '엄마, 손님'하고 내 팔을 밀어준 것도 딸이었다.
지금 5학년인 딸은 초등 2학년 이후로는 우리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혼자 집에서 제 할 일을 하거나 노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에게 아이였던 강아지 마루. 15살이 된 반려견이 주는 안정감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아니다. 스마트폰 때문이다. 아무튼 혼자 있다는 느낌없이 외롭다거나 무서움없이 기다려 주었다.
아이가 아프면 둘 중 하나가 일을 전담하고 조율해서한 명은 언제나 출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하지만 둘을 키우기는 정말 엄두가 나지않았고둘째는 포기했다.
맞벌이 부부들이 얼마나 마음 고생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까맣게 타들어간 속까지는 모를 만큼 아이를 무난하게 키웠고 초등 5학년이 된 지금은 아이도우리와 함께 팀워크를 이뤄가고 있는 것 같다. 뭐든 수월하게, 늦되지 않게 잘 해나가 주는 아이 덕분에 우리는 프리한 부모로 아이가 주는 기쁨을 온통 누리고 있다.
매장이 아주 협소한 편이다. 좁은 공간에서 같이 일하다 보면 부부는 싸우기 마련일 텐데 우린 성격이 맞는지아니면 둘 다 그냥모나지 않게 무난했던지 크게 싸워본 적이 없다. 그것이 아직 우리가 이 일을 이어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는다.하지만 각자 힘든 시간들이 왜 없었겠는가. 남편은 원형탈모를 겪었고 나는 우울을 겪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게 자영업이고, 하루를 잘 살아야 한 달도 살 수 있다.아무래도 가장 힘든 날은 매출이 저조한 날인데 한 마디로 하루를 공친 날들이다. 날씨와 분위기가 싸해지는 날. 한 달에 한두 번은 온 동네가 쥐 죽은듯 조용한 날이 있다.
그런날은 감정이 좀 예민해져서 서로 주고받는 말이 날카롭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안다. 서로 미안한 마음에 더 그렇게 되고 만다. 그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그때의 우울을 안고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희망, 지혜, 자기 계발, 성장 이런 말들을 상상하지도 못한 채 침잠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관해서는 할 말이 정말 많은데 새로운 카테고리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주변에 대부분의 소상공인들은 부부 사장님들이다. 왜 그런 구조가 되었는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인건비가 나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라서 당연한 선택이다. 오히려 부부가 따로 일을 하는 것보다 수입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육아와 일을 병행하려면 한 울타리에 있어야 한다.
부부 사이가 아무리 나빠도 다른 차선책이 없어서 함께 일하고 계신 분들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척하면 척이었다.
남편이 외부로 도어록 설치를 나가고 나는 매장을 지키며 소매품을 판매하고 도장 관련 전화 주문과 방문 손님들을 맡는다. 역할과 담당이 분리되어 있는 셈이다. 내 명의의 사업장이니 내가 대표이고 남편이 실장님이라 생각한다. 블로그나 온라인 홍보는 내 담당이다. 안과 밖에서 서로 열심히 해주지 않았다면 우린 벌써 망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망하지 않은 이유는 팀워크가 좋아서였다. 조직이라는 게 별거 있나. 둘 이상만 모여도 조직이지. 가족 관계도 팀워크이다.
우리에게도 아찔한 상황들이 있었다. 그 고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온 것 같다. 돌아보면 그때 그 큰 파도를 우리가 어떻게 넘어왔는지 대견할 때가 많다. 부족하고 위태롭게 시작했고 사회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두 사람의 감에 의지해 끌고 왔다고 생각된다. 다행히 우린 조금. 아날로그적이라는 것 말고는촉이 좋은 사람이었다.그래서 촉이 발휘된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중대형 마트 안에 입주한 임대 매장. 마트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마트 전체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되었다. 리스크가 컸다. 공사 두 달 동안은 영업을 하지 못하는 것, 리모델링 인테리어에 목돈이 다시 드는 것, 높아지는 임대료, 그럼에도 반이나 더 좁아지는 가게 때문에 품목을 줄여야 하는 모든 일들이 절망적이었다. 재오픈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기도 했다.
우린 마냥 긍정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또 걱정과 불안을 안고 낑낑거리는 편도 아니다. 파도 위에서 서핑을 타듯이 우린 뭐랄까 닥치는 상황에유연했다. 서로 말로 하진 않았지만 우리 부부는 기본적인 생각이 같았고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 아마다른 덕분에 닥치는 일마다 신중하게 의논이 되었던 것 같다. 서로에게 의지도 했지만 더 크게는 서로의 다른 기질을 믿었다.다행히 위험은 잘 피해 가고 작은 기회는 낚아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성실했고 꾸준했고 할 수 있는 노력이 있다면 늘 최선을 다했다. 자영업자의 계산법으로 일단 남는 것이 있을 때 쓰는 편이었고, 일에 필요한 비용과 감가, 재투자에 관련해서는 정확했다. 대금은 절대 미루지 않고 바로 결제했고 제품은 무엇보다 우선으로 가능한부족함 없이 매입해 두었다. 쉽게 보면 안될 원칙들이었다.
돈은 늘 부족했지만 대출이 필요할 때는 잘 운용했고, 그 돈이 남의 돈이라는 생각도 늘 잊지 않고 커지지 않도록 관리했다. 온라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부터 미미한 걸음이지만 주저 없이 시작했고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다.
여기까지 다소 거창하게 말한 걸까. 그렇다면 그동안 사업을 크게 일구었어야 했겠지만 우린 그저 지역의 많은 가게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지역적 특성이 있다 보니 다른 시ㆍ도의 손님들과의 연결이 크지 않다. 어쩌면 동네서점이나 책방보다 바운더리가 작을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찾아가는 서비스 개념으로 우리를 먼저 노출하고 찾아가는 방식이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작은 가게지만 큰 사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원칙들이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나간 15년 중에서 10년은 진짜 하루를 사느라 아등바등했고, 5년은 내일이라고 달라질 것 없는 허무한 마음을 달래며 살았다. 어쨌거나 우린 아직 망하지 않았다. 집 보증금을 빼서 가게 임대 보증금으로 쓰고 원룸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5만 원 집에서 시작했다. 1000-20, 1500-25, 그리고 성동하이츠 402호를 샀다가 10년을 살고 지금의 아파트를 구매했다. 대출은 여전히 있지만 열심히 갚고 있다. 모든 면에서 어제보다 딱 한걸음씩 더 딛고 있다.
그사이 사이에 눈물 바람할 일도 많았지만마음이 통하는 남편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 먹고 일하고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더 이상 바랄 것 없지만그 이상도 꿈꾸고 싶다.그러해서 앞으로의 5년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힘을 내어 버티고 열심히 살아야 할 시기라는 것도 잘 안다. 우리가 행복의 씨앗을 여전히 매일 심어가길바란다.
자영업을 시작하려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상황과 조건이 다르더라도 나의 허술한 면이든, 운이 좋았던 면이든 어느 한구석에서 더 좋은 선택을 위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기를 바란다. '아프니까 사장이다' 아니 '사장은 아프면 안된다.' 기왕이면 건강하게 웃고 살아야한다. 준비가 필요한 일들은 미리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지자. 다음을 위한 공부와 준비는 우리 모두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