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고학년 즈음부터 빈 종이, 하얀 여백만 보면 뭔가를 끄적이고 싶었다. 그래봐야 이상한 기호, 동그라미, 회오리, 네모, 세모 등 낙서만 가득해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6학년 때 그렇게 끄적인 시로 상 하나를 받긴 했지만 그건 처음에 내가 써놓은 시에서 반토막으로 잘린 시였다. 나는 분명 '낮과 밤'에 대한 시를 썼는데 선생님께서 뒷부분은 잘라내고 '하늘'이라고 하자고 하셔서 그 시로 부산 동구 대표로 장려상을 받고 시상식에 가서 황금색 플라스틱 트로피를 받아왔다. 나의 가슴 한쪽이 허전했지만 딸이 상 받아 왔다고 온 동네에 자랑하는 엄마 덕분에 나는 지워버린 반쪽의 시 '밤'을 잊었다. 딱 한 번 받아본 트로피는 엄마에게도 내게도 내내버릴 수 없는 훈장으로 이사를 따라다니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졌다.
나의 두 세계는 그때부터였을까?
엄마는 밝은 빛이고 아빠는상대적 어둠이었다. 밝음과 어둠이 공존한 그림이 늘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내 늘 뒤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다.
때론 살기 힘든 엄마마저 먹구름이 되는데 그럴 때는 격렬한 천둥번개가 쳐서 이불속에 숨었다. 엄마가 이 싸움에서 질 것 같으면 이불에서 나와 아빠에게 대들었다. 엄마한테 그러지 말라고 울었다. 모든 아빠들은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소리 지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안 그러는 아빠도 있다는 걸 친구 집에서 보았다. 친구 집이 우리 집보다 잘 살아서 위축된 것은 있지만 우리가 부끄럽진 않았다. 그런데 가족들의 일에 세심하게 관심이 많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친구의 아버지를 보니 우리 아빠가 부끄럽더라. 그 뒤로는 우리 집 얘기를 어디 가서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 친구가 놀러 온다고 하면 우리 아빠가 있어서 안된다고 했다.
나를 남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낄 때도 짝사랑을 했을 때도 앞날에 대한 생각에 불안했을 때도 종이와 펜이 필요했다. 얘기할 상대가 있는 것 같았다. 언니나 여동생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쌍둥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같은 시선에서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던 내게 끄적임은 다독임이었다.
무엇이 나의 가면이었을까. 사람들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지만 사실 나는 적극적인 아이였다. 동네 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할 때도 주인공이었고 학교놀이를 하면 선생님을 했다. 유치원 재롱잔치 발레 공연에서도 가장 화려한 아이였고, 태권도 시범에서는 정의로운 여전사였다. 대학도 무난히 갔고 아르바이트를 해도 언제나 일머리 좋은 친구였다. 일도 늘 재밌게 했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것도 좋아했다. 그렇게 밝은 사람인 내가 왜 나의 내면이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매번 조금 우울하게 쓰는지 그 이유를 오래도록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아는 내 모습 역시 늘 칭찬하는 딸이었는데 나는 오히려칭찬에 목말랐다.아빠와 나는 사이가 좋아서 여중생땐 오토바이로 등교도 시켜주고 내 발톱도 깎아주고 삶은 밤도 안 부서지게 살살 돌려 깎아서 내 입에 쏙쏙 넣어주는 아빠였다. 나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아빠다. 그런데 왜 기억 속엔 어둡고 무서운 그림들이 많지. 이상하다.
내 감정과 유년기 모습은 나를 통해 생긴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나를 투영하며 거울로 비춰본모습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들여다본 거울속엔 내가 아니라 엄마가 있다.
엄마, 아빠는 자주 싸웠다. 지금 우리 부부가 손발이 척척 맞는 부분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는다. 경제적으로 먹고살기가 팍팍한 삶이었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서로를 원망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늘 엄마 편이었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 엄마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는데 별수 없었던 내가 스스로 미웠던 거 같다. 뭐든 무난하게 잘해온 것들이 아무 소용없었고 특별히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안했다. 나도 커서 이런 엄마가 될 것 같았다.
아~ 나 그랬던 거구나.
그게 아니야, 괜찮아.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엔딩은 내게 엄청난 슬픔과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영애.
엄마가 16살에 고향 전라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20대 때에 청춘으로 반짝이는 모습도 들었다. 엄마의 친구들, 동료들, 상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 엄마 콧대가 높아서 웬만한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많은 남자들을 퇴짜 놓았다는 이야기, 공장에서 일했을 때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이야기, 의리 있는 여성이었던 영애의 이야기, 수없이 많은 우리의 엄마이기 전 영애였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아무리 힘들었어도 그런 과정들은 살기 힘든 와중에도 다 빛나 보였는데 아빠를 만나고 나서부터의 이야기들은 참 우울하고 서글프고 짜증 나고 화나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4대 비극의 시작점이다. 비극은 생각보다 더 흔하다. 왜 하필 모든 것이 너무 맞지 않는 아빠를 만났을까. 딱 아빠만 아니면 됐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오빠와 나를 세 살 터울로 낳고 키우는 동안 엄마는 근근이 살았고 부업도 했고 공장에 다녔고 그 뒤로도 아주 오래도록 힘든 일들을 해야 했다.
내 유년 시절이 어둡게 그려지는 것은 내 모습 때문이 아니라 한 여자의 일생을 통해 보고 자란 일들 때문이었다. 나도 엄마가 되겠구나. 나도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사는 거구나.나는 내가 만들어낸 두려움으로 행복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엄마의 유년기는 나보다 더 아팠구나. 아래로 줄줄이 동생들과 부모님을 건사하는 맏딸의 고생은 나라면 감당하지 못할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지금보다 유년기가 더 그리운 엄마다.
나의 유년 시절을 돌아보고 눈에 보이게 써두고 싶었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내 눈에 비친 엄마를 써두고 싶었다. 내가 모르던 엄마를 남겨놓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점점 나이 드시는 엄마를 보면 이런 것들은 더 놓치기 싫다. 영애의 꿈, 영애의 젊음, 영애의 아픔까지도.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스즈메의 엔딩이 필요했다.
막상 그 낱낱을 글로 옮길만한 재주가 내게 없다는 것도 알았다. 재주가 있었다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대작을 쓰지 않았을까? 사실 난 다 읽어보지도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럴만한 기억력도 글재주도 없어서 두루뭉술한 이런 글을 쓴다. 읽다 보면 정신없는 글, 문맥이 맞지 않아 어지러운 글, 띄어쓰기도 맞지 않는 글이지만 누구보다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엄마를 위해서도 아니라 철저히 나를 위해서이다. 엄마를 내게 남겨두기 위해서다. 나는 100살이 되어도 엄마가 필요하니까.
편향된 기억의 조각들을 써가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간다. 있었던 사건은 같은데 해석이 자꾸 달라진다. 그럴수록 더 써두고 싶었다. 지나간 일들이라 흩어진 연기처럼 이미 형태가 없고 마음 흐르는 방향으로만 자라는 기억들을 내가 언제까지 놓치지 않을지 몰라서 이렇게 써본다.
옛날 일을 써보는 것을 통해 오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늘 말로 다투시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도 이제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원망도 아쉬움도 없는 일이다. '남이 나 같기를 바라지 말라'라는 말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듣고 행하는 것 같다.
두 분이 평생 그것이 안되어 티격태격했지만 갈라설 만큼 서로를 미워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가장 큰 팩트체크다.
자기가 불편한 것을 자기로부터 고치지 않고 상대를 고쳐서 해결하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자기도 상대도 고치지 못했을 뿐이다. 평범했을 뿐이다.그래. 엄마와 아빠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서로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서로를 바꿔 일을 해결하려 했으나 이미 그렇게 자란 것을 두 분도 어쩌지 못했다. 사실은 끝까지 그럴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외식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런 이유가 컸다. 돼지 갈빗집도 중국집도 돈가스도 엄마는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음식으로 고생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티를 내지 않으셨고 나는 오래도록 몰랐다. 뭐든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는 그 염려는 살기 위한 방패였지만 마치 병 같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엄마는 밖에서 먹는 음식이 매우 힘드신 분이시다. 육고기 종류는 아예 못 드시고 해산물 요리도 비위에 안 맞으면 잘 못 넘기신다. 아스피린계의 특정 약에도 부작용이 있다. 엄마의 유년시절이 어땠는지 많이 듣진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타고난 예민함이라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음식을 잘 못 먹는 첫 째 딸을 몹시 안쓰러워하셨다고 들었다. 제 목숨과 바꿔도 모자란 자식인데 아프기라도 하면 더더욱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셨을 외할머니 마음을 이제야 손톱만큼이라도 알 것 같다. 내가 지금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기 때문에 안다. 엄마에게 맞지 않은 음식과 약을 먹었을 때 엄마 눈이 산만큼 부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정확한 인과관계는 여전히 모른다. 병원에서도 시원한 해답은 없었고 혹시 모를 일들을 피해 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를 뺀다던가 살을 꿰맨다던가 간단한 시술도 마취를 할 수 없어서 고통을 참고 그냥 해왔다. 심리적인 이유가 크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도 바뀌지 않았다. 엄마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다.
우리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와 식당을 찾는 것이 어려워 결국 엄마가 해주는 익숙한 밥을 먹을 때가 많았지만 엄마가 연세 드시면서 힘드시니까 가끔 외식을 시작했다. 주말에 친정 식구들을 우리 집으로 오게 했다. 한 끼는 내가 한 음식으로, 한 끼는 배달 음식으로, 한 끼는 외식을 했다. 친정 부모님, 친정 오빠와 나 그리고 남편과 딸, 49년생 엄마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하루 세끼를 해결했다. 잘 없는 일이다. 특별한 일이다.
대화는 부드러웠고 원망도 없었고 오랜만에 외출해서 콧바람 쐬는 시간 동안 모든 게 평범하게 좋았다.
"오늘 좋았다 엄마, 그지?"
"그래~ 나도 오늘 좋다."
아들이 운전하고 딸의 집에 와서 같이 밥 먹는 것이 우리에겐 특별한 이벤트였다. 엄마집을 나서면 우리도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서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사이로 바람이 지나다닌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에서 조금 벗어나는 것 같아서 숨통이 트인다.
내게는 마치 시지프의 신화 같은 이야기. 내가 끝없이 저 산 위로 굴려가고 싶어 하는 바윗 덩이인 가족이 저 산 정상에서 함께 웃기를 기대한다. 계속 미끄러져 내려와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의 숙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