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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Sep 11. 2023

저는 지금 충청남도 논산에 있습니다

D+3 포르투갈길 3일 차


✔️루트 : Azambuja - Valada (약 13km)

✔️걸은 시간 : 4시간






어젯밤 숙소에 늦게 도착하기도 했고 몸이 많이 지쳤기에 충분히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긴장 때문인지 7시에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온몸에 근육통이 느껴졌다. 창을 활짝 열고 아직은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굳은 몸을 천천히 스트레칭해 주었다. 이 여유로움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올라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많이 걷지 않아도 괜찮아.'


스트레칭으로 아침 시작!



Bom Dia, Azambuja! (좋은 아침, 아잠부자!)



오늘 일정은 커피를 마신 후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큰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Azambuja는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아담하고 예쁜 동네였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포르투갈에 온 후 에스프레소만 마셨다. 아는 단어가 'Cafe(커피)' 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사람들도 에스프레소만 마시는 줄 알았다.(카페에 메뉴판은 없다.) 오늘도 ‘Cafe’를 주문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내 옆에 있던 아주머니에게 서빙되는 라떼를 발견했다. 신메뉴 발견에 신이 나 라떼를 가리키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Nome?(이름?)"


어제 속성으로 공부한 포르투갈어가 작게나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유튜브 선생님은 한국인들이 포르투갈에서 자신 있게 자기소개를 하길 바라며 가르쳐 주신 단어겠지만 역시 타지에서는 사회생활보다는 생존이 먼저 인 것 같다. 종업원 대신 아주머니께서 '갈라오(Galão)'라고 대답해 주셨다. 휴대폰에 스펠링을 적어주기를 부탁한 뒤 나도 한 잔을 주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와 함께 빵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순례자 어플에 의지해 순례길을 걷고 있다. 순례자 어플은 내가 걸을 루트(포르투갈길)를 지정을 하면 자동으로 목적지까지의 일일 루트를 제시해 준다. 첫 이틀은 어플에서 추천한 대로 약 30km씩 걸었다.(어플이 이렇게 추천하는 이유는 이 정도면 사람들이 걸을 만하다고 생각해서도 있겠지만 대부분 알베르게가 이 간격마다 있기 때문이다.) 어플은 오늘도 30km 이상을 걷길 추천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오늘 루트에는 다행히 중간 마을인 Valada에 알베르게가 있었고 오늘은 13km가 떨어진 이곳까지만 걷기로 했다.




순례자 어플 'Buen Camino'가 제시하는 데일리 스테이지와 3일차 루트



어젯밤처럼 숙소를 잡지 못하는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미리 알베르게에 전화를 돌렸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놀랍게도 모든 알베르게가 다 꽉 차 있었다. 몇 번이나 침대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후 나도 모르게 통화 중인 알베르게 주인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다른 알베르게도 침대가 다 예약 됐대. 이 이른 시간이 어떻게 벌써 예약이 꽉 찰 수가 있지? 완전 큰일이야. 난 너무 힘들어서 30km는 절대 못 걸어!"


그러자 이 마음 좋은 알베르게 주인은 자신의 정원에 작은 막사가 있는데 거기에서 밤을 보내는 것도 괜찮겠냐 물었다. 그리곤 오랜 기간 방치 되어있었기에 더러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붕이 있고 발 뻗고 누울 수만 있다면 나는 아무 곳이나 상관없어! 정말 고마워! 너는 나의 은인이야!"


전화를 빌려준 옆 테이블 친구와 기쁨의 커피를 한 잔 더 나눈 후 Valada을 목표로 걷기 시작했다.



굿바이 종이들


굿바이 Azambuja



순례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움막 하나 없는 넓은 오지와 지평선 끝 언덕에 솟아 있는 십자가, 그리고 그것을 향해 걷고 있는 사람이었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성지 순례길이라고 해서 걷는 길 내내 가슴이 웅장해지는 무언가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순례길은 참 별 게 없다.


걷다 보면 내가 지금 포르투갈에 있는 건지 한국에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조금만 더 걸으면 잠실이 나올 것 같은 아스팔트 자동차 도로(게다가 갓길도 없어 로드킬 당하기 딱 좋은), 할아버지 댁 가는 길에 본 것 같은 비포장 길, 내가 매일 달리던 러닝 코스를 연상시키는 강가 옆 트랙까지,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많은 시간을 이런 길 위에서 보낸다.


인스타라이브로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저는 지금 충청남도 논산에 있습니다‘류의 농담을 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밭 길을 한참 걷고 있는데 뒤에서 빠른 속도로 걷고 있는 순례자를 발견했다. 걷는 길에 순례자를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기에 반가운 마음에 일부러 걷는 속도를 줄였다.


러시아에서 온 이 순례자는 나처럼 이번이 첫 까미노라고 했다. 15kg은 되어 보이는 그의 배낭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의 배낭 안에는 어떤 것이 들었는지 물었다. 그는 배낭 부피의 반은 응급약품이 차지하며 그의 가장 큰 불안은 다치거나 아픈 것이라고 했다. 그도 나처럼 지난 이틀간 배낭에서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한 듯했다. 이에 대한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 용감한 친구는 오늘도 30km를 걸을 예정이라고 했고 갈 길이 멀기에 짧은 대화 후에 그는 먼저 떠났다.




순례자 표식만이 여기가 유럽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들린 식당에서 러시아 순례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왜 까미노에 왔는지 물었다.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산티아고 순례길이 논산에 난 길과 별반 다르지 않듯 내가 순례길을 걷게 된 이유에는 그다지 거창한 것이 없었다.


퇴사, 이혼 등의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맞은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오다 번아웃이 온 것도 아니다. 마침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서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쉬는 김에 운동을 제대로 못해 떨어진 체력도 좀 올리고 싶었고, 그 김에 겨울 내 찐 살도 좀 빼고 싶었고, 적당히 해외여행도 하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운명의 연인을 만나면 더할 나위 없고.


이 사소한 많은 이유들을 한마디로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운동이 될 것 같아서’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의 소리를 듣기 위해 왔다고 했다. 깊게 질문할 수는 없었지만 그 표현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뭔가 비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내가 가진 사소한 이유들을 모아보면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식당에서 다시 만난 순례자가 식당에서도 크리덴셜에 도장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도착한 알베르게는 주인이 실제 거주하고 있는 가정집이었다. 순례자가 거의 없는 겨울이 지나고 오랜만에 많은 순례자들을 맞는 날이라 주인은 꽤나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친절하게 나에게 공간을 설명해 주었다. 기능에 충실한 호스텔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의 애정이 담긴 공간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는 너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서 자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막사에서 자는 것을 상상하고 왔던 터라 넓은 거실에 자리한 푹신한 소파는 스위트룸처럼 보였다.


"완벽해! 정말 고마워!"

  



알베르게 주인의 반려마와 반려견



오랜만의 손님이 반가운 녀석. 신나게 함께 뛰어놀았다



방에서 쉬고 있던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거실에 나와 인사를 했다. 그중에는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 커플이 있었는데 내가 소파에서 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다시 거실에 나온 그들은 자신들의 방에 침대가 하나 남는다며 함께 자자고 제안해 주었다. 남은 방이 없지만 나를 불러준 알베르게 주인, 방을 함께 나누자고 제안해 주는 순례자들. 어젯밤 침대를 찾기 위해 닫힌 알베르게 대문을 두드리며 마을을 배회했었기에 이들의 아름다운 마음에 배로 감동을 받았다.




지금은 나의 친구가 된 프랑스 순례자들



이미 저녁을 먹었지만 음식과 사람의 좋은 냄새에 저녁을 두 번 먹기로 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알베르게에 함께 묵게 된 모든 순례자들이 거실에 모였다. 미국에서 온 커플, 스위스에서 온 모자, 프랑스에서 온 커플, 포르투갈인 주인, 한국에서 온 나까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지만 같은 길을 걸어왔기에 즐겁게 지난 까미노 여정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스위스 모자는 독일어, 프랑스 커플은 불어, 외는 영어를 주로 했지만 한참을 웃고 떠들며 대화를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에 모인 이들이 나처럼 3일 차까지 30km를 걷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따듯하고 행복했던 저녁식사


음식이라는 건 참 재미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사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레시피였다. 하지만 만든 사람의 정성과 유쾌한 사람들이 함께 하니 어떠한 파인디쉬보다 훌륭했다. 디저트와 함께 음악가인 알베르게 주인의 아름다운 Fado 연주를 들으며 저녁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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