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가상이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의 전환점
기업이 신제품, 혹은 신기술을 공개하는 전시회(Exhibition, Fair, Expo)는 그 기업의 향후 실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자리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 따라 전시회의 규모도 점점 더 커지고 화려해지는 흐름을 보이는데 그 가운데서도 IT 분야의 MWC, CES, IFA와 같은 국제 전시회(1)는 매년 수많은 뉴스를 쏟아내며 그 입지를 견고히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국제 전시회와 더불어 애플, 삼성, 구글 등의 주요 기업들의 경우에는 각각 WWDC, Unpacked, Google I/O(2) 등 전시회 그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시키기 위한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전시회 가운데 가장 관심을 모으는 메인 이벤트 중 하나는 바로 키노트 발표이다. 애플 신제품 발표가 진행되는 시간이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시차에 관계 없이 뜬 눈으로 인터넷 생중계를 관전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것이 요즘이다. 입장권의 가격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아쉽게 입장권을 구입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프라인 공간에 함께 모여서 온라인 생중계를 관람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는 문화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처럼 대중의 관심과 중요도가 높아짐에 따라 키노트 발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다 돋보일 수 있도록 하는 최고의 연출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실험의 무대로 변화하고 있다. 공간을 압도하는 화려한 미디어 연출에서부터 최신의 IT 기술을 활용한 서비스 적용에 이르기까지, 그 날의 발표 내용과 더불어 키노트의 전반적인 연출은 그 완성도에 따라 수많은 이슈를 양산하기도 한다. 다양한 연출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라이브 데모가 아닐까 싶다. 치밀한 사전 준비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의 라이브 데모는 늘 아슬아슬 하기만 하다. 준비된 데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자칫 대중들 실제 경험이 그보다 못할 것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기에 작은 실수 조차도 큰 타격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긴장되는 순간인 것이다.
CES 2014에서 인텔은 매우 실험적인 라이브 데모(영상 보기)를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이 날의 키노트를 통해 인텔이 소개할 내용은 대중들이 직접 사용해보지 않고서는 직관적으로 느끼기 쉽지 않은 새로운 외형과 보다 발전된 성능의 PC 제품들이었는데 게임이나 애플리케이션과 같이 즉각적으로 그 반응이 눈에 보여지는 것과는 다른 성격의 것들이라 이전과는 차별화된 방식의 연출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애플의 스토리텔링과 같이 일상적이고 감성적인 면 만을 강조하기에는 다소 평범해 보일 수 있다는 점 또한 제약으로 작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인텔이 선택한 것은 일상적이거나 감성적인 것과는 정반대의상상 속 스토리텔링인 ‘리바이어던(Leviathan)’(3)이었다. 그리고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상상 속의 스토리텔링이 키노트라는 현실의 공간으로 뛰쳐나오는 당시의 상황은 현장에 있던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한 경험이었다.
키노트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현실의 일상적 상황으로 인식된다. 물론 개인마다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은 분명 영화나 게임을 경험할 때의 인식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현장에는 하나의 작은 순간 조차 놓치지 않고 잡아내기 위해 수많은 카메라들이 무대와 대중들을 포착하고 있기 마련이다. 무대의 전면에는 영화관과 같이 거대한 크기의 스크린이 존재하지만 스크린에 보여지는 키노트 자료나 실시간 카메라 영상은 자연스럽게 현실의 일부로 인식된다. 때문에 스크린 위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면 누군가는 반갑게 손을 흔들기도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당황하며 얼굴을 숨기기도 한다.
인텔의 CEO인 브라이언 크르자니크(Brian Krzanich)는 키노트 발표 도중 SF 세계관을 가진 스콧 웨스터펠드(Scott Westerfeld)의 인기 소설인 리바이어던(4)을 소개한다. 이와 동시에 무대 전면의 스크린에는 소설이 전해주는 상상력을 넘어 실감나는 그래픽을 통해 재현된 고래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하늘을 나는 거대한 고래는 서서히 전진하다가 급기야 스크린 면을 뚫고 관객들의 머리 위를 부유하기 시작한다. 여러 대의 특수한 카메라와 연동되는 스크린 속 영상과 더불어 관객들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태블릿 PC의 스크린을 통해 능동적으로 공간을 탐험하게 되는데, 테크놀로지과 스토리텔링이 하나로 결합되는 이러한 전체의 연출을 통해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관객들과 직접 상호작용하며 강렬한 경험을 전달하게 된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경험하고 있는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컨텐츠의 경우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스마트폰의 스크린을 통해 중첩되는 가상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5) 물론 인텔의 CES 키노트에는 결정적인 순간의 카메라 전환이나 스크린의 경계를 지우는 가상의 구름 등의 트릭이 더해져 있기는 하지만 메인 스크린 상의 컨텐츠를 현실이라고 인식하게 만든 이후 여기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과 같은 세컨드 스크린의 가상성을 더하는 형태의 증강현실은 분명 이전의 것과는 다른 한 단계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200만개의 폴리곤과 400MB 크기의 텍스쳐를 가진 높은 퀄리티로 제작된 3D 컨텐츠는 고사양 하드웨어 기반의 새로운 리얼타임 렌더링 기술을 통해 실행됨으로써 현실 공간과 가상의 컨텐츠 사이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질감을 최소화하는 효과적인 솔루션이었다고 할 수 있다.(6)
흥미롭게도 당시 CES 전시장은 카메라가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마커로 기능하며 현실에 중첩되는 가상의 컨텐츠를 구현하기에 최적화된 형태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공간에서의 미디어 연출이라고 하면 시공이 끝난 벽체 위에 디스플레이 몇 개를 덩그러니 매달아두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까지의 전시장을 떠올려볼 때 이는 참으로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 현실로부터 가상으로의 방향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우리 인류의 스토리텔링의 역사는 이제 그 방향이 역전되는 전환점의 위치에 서있다. 언젠가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때가 되면 우리는 이미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스토리텔링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동일한 속도,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임에 분명하다.
(4) The Little Mermaid Second Screen Live — Blu-ray를 통해 가정에서 경험하던 ‘디즈니 세컨드 스크린’의 경험을 극장으로 옮긴 ‘세컨드 스크린 라이브’의 첫 번째 작품. 이 때의 실험은 이후 팀버튼 감독의 ‘The Nightmare Before Christmas’으로 이어지게 된다.
(5) 인어공주 세컨드 스크린 라이브 전용 아이패드 애플리케이션 다운로드 링크
(6) 세바스챤(Sebastian)과 플라운더(Flounder)은 주인공 애리얼(Ariel)과 더불어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안에서 익살스럽고 사랑스러운 행동으로 인기를 끌었던 보조 캐릭터들이다.
(7) 디즈니는 가정용 Blu-ray 버전의 세컨드 스크린 컨텐츠에서 메인 스크린과의 연동을 위해 TVplus의 ACR(Audio Content Recognition)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8) 스테레오스코픽 3D(Stereoscopic 3D) — 양쪽 눈의 시각 차이를 이용하여 각각의 눈에 한쌍의 서로 다른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3차원적인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기술
(9) 필름 편광 패턴(Film Patterned Retarder, FPR) — 디스플레이 화면에 편광 필름을 부착함으로써 좌우의 영상을 분리하여 볼 수 있도록 하는 기술
(10) 셔터 글라스(Shutter Glasses, SG) — 물리적인 셔터가 양쪽 눈을 번갈아가며 가려줌으로써 양쪽 눈에서 서로 다른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기술
(11) 캐나다의 영화제작사 아이맥스의 기준을 따르는 IMAX를 비롯해 최대 64대의 스피커를 통해 360도의 입체음향을 구현할 수 있는 Dolby의 영화관용 기술인 Dolby Atmos 등의 포멧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12) 최근 영화관에는 Cine de Chef, Boutique M, Sweetbox, Cine Kids, Drive M, Open M, Movie All Night 등 차별화된 상품들이 계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