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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꺽정 Aug 07. 2018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철학

시아틀추장의 철학 vs 자본주의 

인간의 역사는 자본의 역사이다.  통치형태를 불문하고 저변에 깔려있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조선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였고 고대서양, 중세의 서양은 더할 나위없이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사회였다.  가장 비자본주의적인 사회는 아마도 서양의 세력이 몰려들기 이전의 북미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이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달정도에 따라 군사력은 강했고 자본주의만큼 목적이 뚜렷한 체제도 없기에 자본주의와 군사력으로 무장한 세력은 세계를 지배할 수가 있었다.  북미의 원주민들이 유럽의 세력에 속절없이 처참하게 당했던 것은 당연하다.  자본주의를 칭송하는 세력들은 자본주의가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강하고 이상적인 체제라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럴까 하는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북미의 원주민들이 서양사람들에게 희생당한 것은 그들이 비문명적인 종족이어서가 아니다.  북미의 원주민들은 서양의 자본주의 세력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의 자본주의 세력은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파괴하는 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하였지만 원주민들의 생각은 그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인간을 대자연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대자연을 그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탐욕을 위하여 대자연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냥을 하되 자신들이 살아갈 만큼만 사냥을 했고 식량확보를 위하여 동물 등을 가두어서 사육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동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장례식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장례식과는 판이했다.  그들은 관을 짜지 않는다.  시체를 불태우지도 않는다.  그들은 무덤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시체를 나무위에 올려놓고 독수리가 뜯어먹게 한다.  그들에게 독수리는 자신들과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다.  독수리들은 그들의 조상이고 독수리과 그들은 서로 뭔가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대자연속에서 살아가면서 대자연을 흠집내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썼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의 무기는 원시적인 사냥도구 수준에 불과했다.  서양이 총포로 무장하고 침략했을 때, 원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때, 금을 캐기 위해 땅을 파헤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저들은 이런 짓을 범하는 것일까?  대자연은 우리와 분리된 것이 아닌 서로 연결된 생명체이다.  대자연을 파헤치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육하고 숲를 불태우고 땅을 파헤친다.  그들은 서양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북미의 원주민들의 생각을 잘 대변해 주는 글이 있어 인용하고자 한다.  이리유카바 최라는 작가가 쓴 책에서 인용된 나오는 내용이다.  19세기초 백인들이 미국의 서해안 도시 시애틀이라는 지역의 땅을 빼앗을 때, 땅을 빼앗기고 유랑을 할 것인가. 아니면 땅을 지키기 위하여 몰살을 택할 것인가 하는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서 그 지역의 추장 시아틀이 자기 부족식구들과 몇몇 백인 손님을 모아 놓고 한 연설이라고 한다.  


“이 땅의 따뜻한 온기와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팔수 있단 말입니까?  그 사고방식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집니다.  공기의 신선함이나 물의 생기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않은데 어떻게 그것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지구의 어느 부분도 성스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햇빛에 반사하는 소나무 잎사귀나,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깊은 숲속에 맺힌 이슬방울이나, 지저귀고 우는 벌레도 모두 하나하나가 우리 민족에게는 신성한 존재로 경험됐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나무 가지가지에 골고루 퍼지는 수액은 바로 홍인(紅人)들의 업(業)인 것입니다.   


백인들은 죽어서 뭇별사이로 방황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곳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도 아름다운 이 땅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의 일부이고, 땅은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향기가 가득한 꽃들은 우리의 자매들이고 사슴이나 말이나 위대한 독수리는 모두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하늘을 찌르듯 뾰족한 바위 봉우리와, 들판의 풀잎에 담겨있는 단물과, 망아지의 뜨거운 열기와, 그리고 인간은 모두 한가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워싱턴에 있는 대추장이 우리에게 우리 땅을 사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대추장은 우리에게 다른 땅을 주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겠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 땅을 사겠다는 제의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에게는 성스러운 땅이기 때문입니다.  여울과 강을 따라 흐르며 번뜩이는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땅을 당신네에게 판다면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자손에게 호수의 맑은 물에 반사되는 번뜩임은 우리 민족이 겪은 일과 추억을 말해주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가 속삭이는 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강은 우리의 목마름을 식혀주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떠내려보내주고 우리 아이들을 먹여줍니다.  우리가 이 땅을 판다면 당신은 강이 당신네와 우리의 형제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네들의 형제에게 베푸는 친절을 강에도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백인들이 우리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당신네는 한쪽의 땅은 여기에 있으나 저기에 있으나 모두 똑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네들은 밤중에 와서 그 땅에 있는 필요한 것들을 무엇이든 갖고 떠나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에게는 땅이 형제가 아니라 다만 적으로만 간주될 따름입니다.  당신네들은 그 땅을 정복하고 나면, 또 다른 곳을 정복하러 떠나 버릴 것입니다.  그 땅에는 당신네들 조상의 무덤만 남겨놓고 당신네 조상이 낳은 자식들의 타고난 권리는 망각해 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어머니, 형제, 땅, 하늘 같은 것들을 마치 가축이나 구슬처럼 사서 좋은 것은 뽑아 갖고 팔아치우는 물건으로 취급합니다.  당신네들이 그 왕성한 식욕으로 땅을 삼켜 먹고 난 다음 떠나간 자리에는 사막만 남게 됩니다.  


당신네들의 방법과 우리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무식합니다.  당신네들이 이룩해 놓은 도시는 홍인(紅人)들의 눈에는 가시로만 보입니다.  필경 이 이유는 내가 야만이고 당신네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습니다.  그 곳 아무 구석에 가도 봄철에 잎사귀가 피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벌레가 날개를 비비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들리는 뚝딱소리는 다만 나의 귀를 어지럽혀 줄 뿐입니다.  밤중에 외로운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연못가의 개구리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서 남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다만 홍인종일 뿐이기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주민들은 연못 위를 스쳐지나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빗물에 씻겨 청신한 솔방울의 향기를 담아온 그 바람의 냄새를 좋아합니다.  


공기라는 것은 삼라만상이 함께 호흡을 나누기 때문에 홍인종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뭇짐승과 나무와 인간, 모두들 같은 호흡을 함께 나눕니다.  백인들은 숨쉬고 있는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죽은 지 여러날 되어 썩은 시체의 냄새가 배어 의식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땅을 팔았을 때, 당신네들은 공기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기가 유지해 주는 모든 생명의 얼을 공기는 함게 공유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조상이 첫숨을 쉬게 만든 그 바람은 그 마지막 한숨을 몰아 쉬게 만든 바람과 같은 바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땅을 팔게 되면 당신네들도 우리와 함께 맛볼수 있는 들판의 꽃으로 달콤해진 바람이 있는 이땅을 성스럽게 여겨 다른 땅과 다르게 보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땅을 사겠다는 당신의 제의를 숙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땅을 판다면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백인들이 이땅에 있는 뭇짐승들을 형제로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야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백인들이 기차타고 지나가면서 총을 쏘아죽인 수천마리의 들소가 썩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야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만 죽였던 그 들소보다 화통이 달린 철마가 더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짐승인 없다면 어떤 인간이 된단 말입니까?  만일 짐승이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은 영혼이 메말라서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짐승에게 일어나는 일은 얼마 안 있어서 인간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은 당신네 자식들에게 당신들이 밟고 있는 땅이 우리 조상들이 불타죽은 재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땅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땅위에는 우리의 형제자매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해 주십시오. 또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를 잉태해준 어머니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당신네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땅이 당하는 일은 땅의 자식들이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생명의 거미줄을 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다만 그 거미줄의 한 가닥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명의 거미줄에 대하여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아무리 백인들 당신네들이 하나님과 친해서 친구처럼 함께 산책하고 대화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공동으로 처해있는 운명은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한가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종국에 가서 백인들의 하나님이나 우리의 하나님이나 같은 하나님일 것이라는 것을 당신네들이 깨닫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필경 당신네들은 우리의 땅을 소유하듯 당신네 하나님도 소유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고 홍인종이나 백인종이나 모두에게 평등한 자비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하나님에게 매우 귀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해를 입힌다는 것은 창조주에게 욕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백인들도 죽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종족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네들은 자신의 잠자리를 오염시켜 언젠가는 자신의 오물에 질식하게 되는 밤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네들은 그렇게 희생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오히려 당신네들이 이 땅에 와서 여기에 있는 홍인들을 지배하는 특별한 사명을 주었다는 그 하나님의 위덕으로 불에 타 밝은 광명을 발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들소들은 학살당해 없어지고 야생말이 모두 길들여져 없어지고 숲속 깊은 곳이 육중한 인내로 가득차고 보이는 언덕은 말하는 전기줄로 얼룩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당신네들의 인생살이가 우리에게는 신비롭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숲이 어디 있습니까? 사라졌습니다.  독수리는 어디 있습니까? 이것도 사라졌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내가 느끼는 것은 기독교주의적 서양의 자본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그들은 매우 미개한 하등동물이라는 것이다.  미개한 하등동물이 막강한 힘 군사력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서양인들의 북미대륙 침략시 발생한 일이다.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아프리카에 침략해 노예장사를 한 것도 다름아닌 그들이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상황은 과거에만 있었던 상황이 아니고 지금 현실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우리 중 95%는 지금 15~19세기 북미대륙의 원주민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중 소수인 5%는 북미대륙을 침략하여 약탈을 계획하고 있는 서양인과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을 해보아야 한다.  이 상황이 또다시 반복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나가야 하는지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지할 성찰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의 미래 우리 후손의 미래에 대하여 책임질 수 있다.  그 옛날 서양인의 북미대륙의 약탈은 제한적이었지만 지금 자본주의의 약탈은 전면적이고 파괴적이서 이번의 약탈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그 상황을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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