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동학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실 나도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아직까지 읽어보지를 못했다. 나의 해묵은 숙제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한번 꼭 읽어볼 예정이긴 하다.
동학은 종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후일 손병희에 의해 종교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시대적 상황에 유리하다 판단하여 이름도 천도교로 바꾸고 종교단체의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지만 동학(천도교)은 종교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기복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서양종교의 주류인 기독교는 내세에 천국으로 가게 해 달라는 소망이다. 불교도 원래는 기복신앙이 아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극락왕생을 바라는 기복신앙의 형태로 다소 변질되어 있다. 그래도 불교의 근간은 해탈이다. 해탈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탈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해탈을 선언한 스님들은 많지만 그 스님들이 영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여 세계사를 바꾼 것도 없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해탈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것, 내가 욕심부리는 것을 그만두는 것. 존재하는 이 상태, 현재의 현상 그대로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나를 맡기는 것. 그런 것이 해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생명체는 가지고 태어난 이기적 본능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해탈이 어려운 것일 것이다. 하지만 설사 어려운 그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해탈 전의 세상이나 해탈 후의 세상이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해탈한 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또는 철학이 해탈 전과 대비하여 많이 바뀌어져 있을 것이다. 그뿐이다. 그것이 불교의 한계이다. 불교는 이 세상을 보다 좋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실세계에 지친 중생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이나 안식을 줄 수는 있을 것이지만 그 중생들에게 근원적인 해결책을 주지는 못한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사회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서가 아니다. 기독교는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로마사회의 빈민들에게 현세에서 보다 잘 살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아니고 현세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고 주 그리스도를 지금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졌을 뿐이다. 개 돼지처럼 살고 있던 로마의 빈민들에게 그 메시지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기적인 본능을 가진 다양한 생명체들이 자기의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을 함으로써 생태계가 균형을 유지하여 이 세상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생명체 간의 이기적인 본능들이 부딪치고 서로 싸우면서 지는 자 이기는 자가 발생하는 그 순환과정을 통하여 이 세상이 균형을 유지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근본 원리가 이런 세상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태계의 뜻에 따라 치열한 생존경쟁을 수행하는 생명체(인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왼쪽 빰을 맞으면 오른쪽 빰도 내주어라. 원수를 용서하라. 욕심을 내려놓아라. 생명체를 해치지 말아라.라는 근본원리에 반하는 메시지를 내놓는 것이 고작이다. 치열한 생존경쟁 과정에서 희생된 자들을 위로하고 추모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거나 천국으로 인도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종교가 가진 유일한 역할일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나는 종교가 그 역할에 충분히 충실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 이상을 종교에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종교는 스스로가 이런 역할의 한계를 넘어서곤 한다. 종교는 생존경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존재하여야 하는데 종교가 생존경쟁의 싸움에 직접 참전을 한다. 중세시대의 기독교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종교가 세력을 만들고 이익집단화하고 힘을 키워서 다른 대상에게 영향력을 미치려고 한다. 종교의 구성원이 생명체(인간)이기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종교는 그러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종교는 생존경쟁의 무자비함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 그 역할이지 그 무자비함에 직접 참여하여 희생자를 만들고 세력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현세를 상황을 바꾸자고 하지 않는다. 종교는 현세의 어려움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보이지도 않는 절대자를 설정하고 이를 믿고 소망하라 하고,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니 좋든 싫든 이를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리하면 죽어 천국에 이르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그것이 일반적인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다. 이것이 종교의 한계이다. 종교 무용론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세의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절대자를 믿으면서 참고 견디고 살다가 보면 죽어 천국에 가니 믿음을 잃지 말라고 할 뿐이다.
내가 종교가 아닌 동학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학은 사회운동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동학은 사후세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동학은 사후세계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실이 공정하지 않고 살기 힘들면 그 이유를 찾아 고쳐내어 현실을 공정한 사회로,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자는 것이 동학의 생각이다. 있지도 않은 사후세계에는 관심조차 없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이 우리가 숨 쉬는 이 대기가 사후세계일 것이다. 즉 사후세계도 별도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이곳이 현세이고 사후세계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을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현재의 이곳 이 시간에서 찾고자 한다. 동학농민군은 지독한 수탈에 맞서 봉기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그들의 철학을 현세에 실현시켰다. 이것이 동학의 철학이다. 여기에서 동학의 위대함이 나온다. 수천 년 인류의 역사에서 이런 위대한 사상을 품었던 적은 없었다.
동학의 기본 사상은 공경이다. 이 세상 만물에 대한 공경이다. 공경이란 나와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인내천사상은 인간과 하늘이 같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하늘과 같다는 의미 한다. 즉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동학은 이야기한다. 이것을 공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학은 삶의 방법으로 일상 속에서 매사에 정성과 공경의 태도로 살아가는 삶, 그리고 다른 사람과 자연만물을 부모님과 같이 존대하고 공경하며 살아가는 삶을 제시한다.
만약에 인류가 이러한 삶의 방법을 따랐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문제 환경문제 심각한 갈등 등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발생하였다 하더라도 초기에 해결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이 매우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면 지금 주류인 종교나 철학 등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수천 년이 흘러오면서 수많은 갈등과 참혹한 전쟁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심각한 갈등과 전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추구했던 것이 그른지 올바른지 돌아봐야 하고 새로운 길이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동학의 사상은 인류를 새로운 길로 이끌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우리 민족이 품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인류사적으로 축복이 아닐까 한다. (동학의 사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많을 것이나 최근에 우연히 보게 된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에서 펴낸 ‘청년, 동학을 짓다’의 참여작가인 백진솔 철학박사(과정)의 ‘사람다운 삶과 사회로 가는 마중물’ 편을 읽어보길 권한다.)
우리나라의 헌법 전문을 보면 동학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前文]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이 전문에서 매우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역할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견디지 못한 정도로 심각한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이 평등과 공정을 부르짖으며 시작되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전라도에서 중앙집권통치방식이 아닌 농민들이 참여하는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었다. 집강소가 바로 그것이다. 믿을 수 있는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국가에서 생겨난 일이다. 그때까지 전 세계를 통틀어 이런 선진적인 체제를 갖추어 시행하는 나라가 있었던가? 지금도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고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이루어낸 집강소와 같은 뼛속까지 민주주의인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는 없는 듯하다. 집강소를 보면서 나는 고대로마시대의 호민관제도를 떠올렸다. 호민관제도는 기존의 기득권세력의 전횡을 막기 위해 생겨난 제도이지만 호민관인 그락쿠스형제의 피살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호민관은 권한은 있었지만 그 권한을 지켜낼 힘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의 호민관과는 달리 동학의 집강소가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기본사상이 굳건하였고 이를 지켜내고자 했던 동학군인 농민들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그대로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로 이어진다. 김구 선생 손병희 선생 등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셨던 분들의 대부분이 동학농민혁명의 참여자였다. 3.1 운동도 동학농민혁명의 연장선이고 그 이후 행해졌던 독립운동, 해방 후 4.19 혁명, 군부독재시절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져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헌법전문에 동학농민혁명을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쉽다. 후일 헌법이 개정될 일이 있다면 동학농민혁명이란 글자가 헌법전문에 포함되어 새겨졌으면 한다.
동학의 기본사상인 나와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한 공경사상이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아로새겨지고 우리 사회 체제의 시발점인 헌법전문에 수록되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법률 및 사회계약체제가 세부적으로 만들어져 나간다면 대한민국은 보다 성숙한 사회로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전 세계에 이를 확장한다면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는 이 세상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종교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