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은 열심히 산 자들의 훈장이 아니라, 자기 착취의 결과 보고서다
오후 3시의 사무실은 기묘한 침묵에 잠긴다.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와 간헐적인 마우스 클릭 소리만이 이 공간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칸막이 너머의 동료들은 각자의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웅크리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네 번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지만, 카페인은 더 이상 혈관을 타고 흐르지 않고 위장에 고여 쓴맛만 낼 뿐이다. 단순히 몸이 피곤한 것이 아니다. 영혼이 헐거워진 느낌. 우리는 이것을 흔히 '번아웃(Burnout)'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번아웃이 오면 휴양지로 떠나거나, 맛집을 찾아다니며 '힐링'을 시도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일요일 저녁이면 도돌이표처럼 불안은 다시 찾아온다. 나는 이 문제가 단순히 휴식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시대정신의 문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 사회를 '성과 사회'로 규정했다. 과거의 사회가 "하면 안 돼"라는 규율로 통제되는 '규율 사회'였다면, 지금은 "할 수 있어(Yes, we can)"라는 긍정이 지배하는 사회다. 언뜻 보기에 우리는 자유롭다. 채찍을 든 감독관도, 감시하는 간수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비극은 시작된다.
감독관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이상적인 자아'를 앉혀 놓았다. 그 내면의 감독관은 외부의 독재자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남들은 다 하는데 넌 왜 못 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거야." 우리는 스스로를 경영하고, 스스로를 개발하고, 마침내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한 완전범죄다. 타인이 시킨 야근이라면 반발이라도 하겠지만, 내가 나의 성공을 위해 선택한 야근이기에 우리는 저항할 명분을 잃는다.
우리가 번아웃 되는 건 나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긍정적이고, 시스템에 너무 잘 순응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부를 태워서라도 기대에 부응하려는 그 착한 성실함이 우리를 잿더미로 만든다. 우울증은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가 낳은 필연적인 질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퇴사가 답인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사는 한, 완벽한 탈출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저 유명한 문장을 주문처럼 외운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무조건적인 긍정(Yes)의 폭주를 멈추는 것은, 무기력이 아닌 주체적인 부정(No)이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세상의 요구 앞에서, 잠시 쓸모없어질 권리를 주장하는 것.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생산성과 무관한 철학 책을 읽거나, 아무런 목적 없이 산책을 하는 것.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나를 착취하는 시스템에 대한 가장 소소하고도 강력한 저항이다.
오늘 나는 기꺼이 피로하기로 한다. 성과를 내기 위한 피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텅 빈 시간을 갖기로 한다. 타버린 재 위에는 다시 꽃이 피지 않으므로, 완전히 연소되기 전에 스스로 불을 꺼야 한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한병철, 『피로사회』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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