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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출근길의 이상

자본의 골방을 박차고 나와 정오의 태양을 마주할 권리에 대하여

by 월하문

1. 80년 전의 '박제'와 오늘날의 '직장인'


이상의 소설 「날개」의 도입부 문장은 언제 읽어도 서늘하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일제 강점기라는 거대한 시대적 압제 속에서 지식인이 느꼈던 무력감은, 80년이 지난 지금 거대한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현대인의 피로와 묘하게 닮아 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지하철이라는 좁은 상자 속에 몸을 구겨 넣으며 스스로를 박제한다. 자본이 요구하는 규격에 맞춰 나를 깎아내고, 표정을 지우며, '박제된 천재'처럼 박제된 업무를 수행한다. 그곳에 '나'라는 주체는 없다. 오직 직함과 사번만이 남을 뿐이다.


2. 자본의 골방, 아스피린과 아달린의 구분


소설 속 주인공은 아내가 주는 돈에 안주하며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방안에서 뒹군다. 그에게 아스피린(해열제)과 아달린(수면제)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내가 깨어있는지, 잠들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

우리의 삶도 이와 유사하다. 주말의 화려한 소비(아스피린)는 주중의 고단한 노동(아달린)을 견디게 하는 보상처럼 주어지지만, 그것이 진정한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비를 위해 노동하고, 노동을 위해 다시 소비하는 이 순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린다. 내가 소비하는 명품과 미디어가 곧 나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자본의 골방에서, 우리는 주인공처럼 서서히 마비되어 간다.


3. 겨드랑이가 가려워질 때, 비상을 꿈꾸다


소설의 절정에서 주인공은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겨드랑이가 가려워짐을 느낀다. 그것은 퇴화해버린 날개가 다시 돋아나려는 생의 신호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다시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 문장은 단순한 비명이 아니다. 시스템에 길들여진 박제의 삶을 거부하고, 인간 본연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다. 작가로서,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 이로서 나는 이 가려움에 주목한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껴지는 공허함, "이게 정말 내 삶인가?"라는 의문은 날개가 돋으려는 전조 증상이다. 그 가려움을 무시하지 않고 직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박제에서 벗어날 준비를 시작한다.


4. 정오의 사이렌이 울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


소설 속 정오의 사이렌은 주인공을 깨운다. 우리에게도 사이렌이 필요하다. 그것은 문학일 수도, 철학일 수도, 혹은 누군가에게는 이 블로그의 짧은 글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규정한 '쓸모'라는 틀 밖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 비록 내일 다시 출근이라는 골방으로 들어가야 할지라도,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날 자리가 있음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상의 문장을 오늘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다.


[함께 읽으면 좋은 텍스트]


이상, 「날개」: 한국 모더니즘 소설의 정점. 자아의 분열과 통합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묘사한 작품은 드뭅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우리가 왜 '소비(소유)'에 집착하며 '존재'를 잃어버리는지 철학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Q. 당신의 일상에서 '겨드랑이가 가렵다'고 느껴지는 순간(시스템 밖의 나를 꿈꾸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당신을 박제로 만드는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당신만의 '옥상'은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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