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나는 경적을 울린다, 고로 존재한다

피로사회 속 '빡침'의 철학(Honk, Therefore I Am)

by 월하문

1. 프롤로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무거움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2025년 대한민국(그리고 LA)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 명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나는 화낸다, 고로 존재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Beef)>은 마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사소한 시비가 어떻게 두 인간의 인생을 믹서기처럼 갈아버리는지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다. 주인공 대니(스티븐 연)와 에이미(앨리 웡)는 서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왜냐고?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내 자동차 클락션 소리밖에 없으니까.


2. 한병철이 진단한 '피로사회'의 표본들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이 타인의 착취가 아닌 '자기 착취'의 굴레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이 드라마는 그 이론의 완벽한 영상화다.


대니 (노동계급의 자기 착취): 그는 성실하다. 멍청할 정도로. 동생 뒷바라지하랴, 부모님 모셔오랴, 코인으로 한탕 해보랴. 그는 스스로를 '가장'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한다. 그가 느끼는 분노는 사실 에이미를 향한 게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인 자신의 '무력감'을 향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는 이제 공장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다.

에이미 (성공한 자본가의 자기 착취): 그녀는 부자다. 우아한 사업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웃고 있는 가면 뒤에서 썩어가고 있다. "다 가질 수 있다"는 긍정의 과잉이 그녀를 갉아먹는다. 그녀에게 쉼이란 죄악이고, 행복은 인스타그램에 전시해야 할 과제다.


둘 다 열심히 사는데, 둘 다 불행하다. 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성취'라는 신을 모시는 노예들이니까.


3. 사르트르: 타인은 지옥이다, 근데 나도 지옥이다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대니와 에이미는 서로에게 완벽한 지옥이 되어준다. 서로의 집에 오줌을 갈기고, 불륜을 저지르고, 직장을 박살 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 진흙탕 싸움 속에서 그들은 기묘한 '연대감'을 느낀다는 거다.

내 고통을 이해해 주는 건, 상담 치료사도 아니고 다정한 남편도 아니다. 나만큼이나 인생이 개판인 저 '원수'뿐이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면서 역설적으로 서로의 '바닥'을 확인하고 위로받는다. "너도 나만큼 썩어있구나. 다행이다." 이것은 혐오일까 사랑일까? 프로이트가 봤다면 아마 '죽음 충동(Thanatos)'이 빚어낸 가장 변태적인 로맨스라고 진단했을 거다.


4. 쇼펜하우어의 처방전: 고통은 삶의 기본값이다


드라마의 후반부, 사막에서 조난당한 둘은 독초를 씹어먹고 환각 상태에서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은 영상으로 쓴 철학 에세이다.) 그들은 깨닫는다. 인생은 원래 고통(Suffering)이고, 행복은 그 사이 잠깐 스쳐 가는 광고 타임 같은 것임을.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대니와 에이미는 고통을 없애려고(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쳤기에 화가 났던 것이다. "왜 내 인생은 마음대로 안 돼?"라는 질문 자체가 오만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편다. 체념이 주는 평화,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운명애)'의 순간이다.


5. 에필로그: 우리는 모두 시한폭탄이다


<성난 사람들>을 보며 낄낄거리다 보면 어느새 등골이 서늘해진다. 화면 속 저 광인들이 오늘 아침 거울에서 본 내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서다. 상사가 헛소리할 때, 배달 음식이 늦을 때, 앞차가 깜빡이 없이 끼어들 때. 우리 마음속의 '대니'는 언제든 벽돌을 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누군가 당신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낸다면 너무 화내지 마시라. 그는 지금 당신에게 화내는 게 아니다. 그저 "나 지금 너무 힘들어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욕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법치국가니까.)


[오늘의 한 줄 요약] 화병(Hwa-byung)은 한국 고유의 병이라던데, 넷플릭스를 보니 이제 글로벌 표준이 된 것 같다. K-성질머리의 위대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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