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속 '빡침'의 철학(Honk, Therefore I Am)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2025년 대한민국(그리고 LA)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 명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나는 화낸다, 고로 존재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Beef)>은 마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사소한 시비가 어떻게 두 인간의 인생을 믹서기처럼 갈아버리는지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다. 주인공 대니(스티븐 연)와 에이미(앨리 웡)는 서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왜냐고?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내 자동차 클락션 소리밖에 없으니까.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이 타인의 착취가 아닌 '자기 착취'의 굴레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이 드라마는 그 이론의 완벽한 영상화다.
대니 (노동계급의 자기 착취): 그는 성실하다. 멍청할 정도로. 동생 뒷바라지하랴, 부모님 모셔오랴, 코인으로 한탕 해보랴. 그는 스스로를 '가장'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한다. 그가 느끼는 분노는 사실 에이미를 향한 게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인 자신의 '무력감'을 향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는 이제 공장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다.
에이미 (성공한 자본가의 자기 착취): 그녀는 부자다. 우아한 사업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웃고 있는 가면 뒤에서 썩어가고 있다. "다 가질 수 있다"는 긍정의 과잉이 그녀를 갉아먹는다. 그녀에게 쉼이란 죄악이고, 행복은 인스타그램에 전시해야 할 과제다.
둘 다 열심히 사는데, 둘 다 불행하다. 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성취'라는 신을 모시는 노예들이니까.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대니와 에이미는 서로에게 완벽한 지옥이 되어준다. 서로의 집에 오줌을 갈기고, 불륜을 저지르고, 직장을 박살 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 진흙탕 싸움 속에서 그들은 기묘한 '연대감'을 느낀다는 거다.
내 고통을 이해해 주는 건, 상담 치료사도 아니고 다정한 남편도 아니다. 나만큼이나 인생이 개판인 저 '원수'뿐이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면서 역설적으로 서로의 '바닥'을 확인하고 위로받는다. "너도 나만큼 썩어있구나. 다행이다." 이것은 혐오일까 사랑일까? 프로이트가 봤다면 아마 '죽음 충동(Thanatos)'이 빚어낸 가장 변태적인 로맨스라고 진단했을 거다.
드라마의 후반부, 사막에서 조난당한 둘은 독초를 씹어먹고 환각 상태에서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은 영상으로 쓴 철학 에세이다.) 그들은 깨닫는다. 인생은 원래 고통(Suffering)이고, 행복은 그 사이 잠깐 스쳐 가는 광고 타임 같은 것임을.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대니와 에이미는 고통을 없애려고(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쳤기에 화가 났던 것이다. "왜 내 인생은 마음대로 안 돼?"라는 질문 자체가 오만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편다. 체념이 주는 평화,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운명애)'의 순간이다.
<성난 사람들>을 보며 낄낄거리다 보면 어느새 등골이 서늘해진다. 화면 속 저 광인들이 오늘 아침 거울에서 본 내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서다. 상사가 헛소리할 때, 배달 음식이 늦을 때, 앞차가 깜빡이 없이 끼어들 때. 우리 마음속의 '대니'는 언제든 벽돌을 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누군가 당신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낸다면 너무 화내지 마시라. 그는 지금 당신에게 화내는 게 아니다. 그저 "나 지금 너무 힘들어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욕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법치국가니까.)
[오늘의 한 줄 요약] 화병(Hwa-byung)은 한국 고유의 병이라던데, 넷플릭스를 보니 이제 글로벌 표준이 된 것 같다. K-성질머리의 위대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