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드라마 시청자들은 탄산 중독이다. 악당이 처절하게 망하고, 주인공이 법의 심판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그 짜릿한 '사이다' 한 방을 원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넷플릭스 <자백의 대가>는 당신의 목구멍을 꽉 막히게 할 고구마 트럭을 몰고 온다.
이 드라마가 불편한 이유는 간단하다. 법이 정의를 구현한다는 우리의 오래된 판타지를 철저히 배신하기 때문이다. 법정에 선 주인공들을 보라. 그곳은 선과 악이 대결하는 성전(聖殿)이 아니다. 그저 더 비싼 증거와 더 그럴듯한 논리를 가진 쪽이 승리하는 '논리 경연 대회'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재판장이 "땅, 땅, 땅" 하고 판결을 내리면 진실이 밝혀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법철학적으로 법원은 '실체적 진실(Material Truth)'을 찾는 곳이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곳이다.
드라마 속 판사들의 표정을 보라. 그들은 안윤수(전도연)가 진짜 살인자인지 아닌지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 증거가 적법한 절차로 수집되었는가?', '검사의 논리에 구멍은 없는가?' 따위다. 판사봉 소리는 정의가 실현되는 웅장한 타종 소리가 아니다. 그저 "오늘 업무 끝, 다음 사건 들어오세요"를 알리는 은행 창구의 띵동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자백의 대가>는 법이라는 시스템이 얼마나 기계적이고, 때로는 무능할 정도로 건조한지 보여줌으로써 '법치주의'라는 신화를 조롱한다. 귀를 막고 서류만 보는 정의의 여신 앞에서, 주인공들의 절규는 그저 소음공해일 뿐이다.
결국 주인공들이 선택한 길은 시스템 밖으로의 탈주다. 여기서 우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그 유명한 경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볼 것이다."
도덕 교과서는 이 말을 "그러니 괴물이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해석은 다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 이 지옥 같은 세상의 진짜 괴물들을 이길 방법이 있어?"라고 반문한다.
안윤수와 모은은 법의 보호를 포기하는 대신, 스스로 심판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 과정에서 손에 피를 묻히고, 도덕적 타락을 감수한다. 그들은 니체의 경고를 무시한 게 아니다. 심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심연의 일부'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나는 이들의 타락이 슬프기보다 오히려 숭고해 보였다. 법전만 달달 외우는 샌님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야수의 정의'를 실현하고 있으니까.
드라마는 끝났지만 개운함은 없다. 악인은 처벌받았는가? 글쎄. 선인은 보상받았는가? 아니. 화면이 꺼지고 검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다. 끝까지 숨 붙어 있는 놈이 승리하는 거다.
<자백의 대가>가 우리에게 청구한 진짜 대가(Price)는, "법을 믿느니 내 주먹(혹은 내 파트너)을 믿겠다"는 위험한 사상을 심어준 것이다. 해피엔딩은 동화책에나 있다. 현실은 서바이벌이다. 그러니 살아남아라. 괴물이 되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