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을 결제하시겠습니까? : 시간이라는 이름의 자산

인타임 : 타임 푸어(Time Poor)가 진짜 '사망'을 의미하는 세상

by 월하문

1. 프롤로그: 커피 한 잔에 4분, 버스비에 2시간


이 세상에선 25세가 되면 노화가 멈추고, 왼쪽 팔뚝에 형광색 디지털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은 단 1년. 더 살고 싶다면 일을 해서 시간을 벌거나, 남의 시간을 훔쳐야 합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내 수명에서 4분을 떼어줘야 하고, 월세를 내려면 며칠분의 생명을 지불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시간은 금'이 아니라 '시간은 목숨'인 셈이죠. 회계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신체 자체가 하나의 '현금창출단위(CGU)'가 되어버린 셈인데, 이 유동자산이 바닥나는 순간 상장 폐지(사망)입니다. 이보다 더 명확한 자본주의적 은유가 있을까요?


2.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당신의 야근이 사장의 영생이 될 때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시간 중 일부를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창출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 이론을 물리적으로 실현합니다. 빈민가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간신히 연명하는 '엔드리스 루프'에 갇혀 있고, 부자들은 수천 년의 시간을 쌓아두고 영생을 누립니다.

부자들이 누리는 영생은 사실 가난한 자들이 잠도 못 자고 뛰어다니며 지불한 '분초'들의 총합입니다. 노동의 소외가 아니라 '생명의 소외'죠. "누군가 영생하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대사는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의 포식자적 본질을 아주 투건방지게 찌릅니다. 우리가 야근하며 깎아 먹는 수명이 결국 누군가의 배당금이 된다는 사실을 이토록 시각적으로 잘 보여줄 수 있을까요?


3. 하이데거와 '죽음을 향한 존재': 만수무강이 주는 권태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라고 정의했습니다.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의미를 갖는다는 거죠.

하지만 10,000년의 시간을 가진 영화 속 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습니다. 걷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며, 그저 영원한 지루함 속에 박제되어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이건 '실존적 공허'의 극치입니다. 반면, 1분 1초를 다투며 달리는 빈민가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뜨겁게 살아있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야 비로소 생의 활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이 아이러니. 하이데거가 봤다면 무릎을 탁 쳤을 블랙 코미디입니다.


4. 인플레이션의 공포: 시스템은 절대 당신이 쉬게 두지 않는다


주인공이 운 좋게 100년의 시간을 손에 넣자, 시스템은 즉각 응수합니다. 물가를 올리는 거죠. 어제 1시간이었던 커피값이 오늘은 2시간이 됩니다.

이것은 통화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노동력을 계속해서 시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시스템의 설계입니다. 자산이 쌓여 노동을 멈추려는 인간이 생기면, 시스템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채찍을 휘둘러 다시 그들을 일터로 내몰아버립니다.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자본은 결코 멈춰있는 돈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요. 그것이 인간의 생명일지라도 말입니다.


5. 에필로그: 우리는 지금 얼마를 결제하고 있는가

영화의 끝에서 주인공은 '시간 은행'을 털어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하지만 저는 의문이 듭니다. 모두에게 100년씩 나눠준들, 그들이 그 시간으로 다시 '유튜브 오락거리'나 소비하며 시간을 탕진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요?

노동이 사라지고 시간이 넘쳐나는 미래, 우리는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까요? 아마 또 다른 형태의 '시간 죽이기'를 발명하느라 애를 쓰겠죠.


[오늘의 요약]

결론: 당신의 퇴근길이 급한 이유는 버스가 끊겨서가 아니라, 자본이 당신의 시간을 야금야금 인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단점: 영생은 매력적이지만, 수만 년 동안 재무제표만 보고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깔끔하게 폐업(사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한계: 은행을 턴다고 시스템이 바뀌진 않는다. 시스템은 언제나 더 큰 '타임 세일'을 준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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