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심리적 리스크를 회피하려다 실존 자체를 폐업해버리는 오류
이별 후의 고통은 지독합니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고, 함께 갔던 식당이나 같이 듣던 노래는 이제 쳐다보기도 싫은 '불용 자산'이 되죠. 주인공 조엘은 결단을 내립니다. 기억 삭제 전문 업체인 '라쿠나(Lacuna) 사'를 찾아가 전 애인 클레멘타인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지워달라고 합니다.
회계적으로 보자면 이건 아주 합리적인 '자산 손상(Impairment)' 처리입니다. 보유하고 있어 봐야 고통이라는 유지비만 발생하는 자산을 장부에서 완전히 지워버림으로써, 심리적 재무제표를 깨끗하게 청소하겠다는 의도죠. 하지만 과연 인간의 영혼이 엑셀 시트처럼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까요?
니체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라쿠나 사의 모토이기도 하죠.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면 인간은 다시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철학과를 졸업하며 칸트와 헤겔 사이에서 고뇌해 본 제 눈에, 이 망각은 '실존의 거세'와 다름없어 보입니다. 니체가 말한 망각은 고통을 딛고 넘어서는 '능동적 망각'이지, 기계의 힘을 빌려 뇌의 일부분을 도려내는 '수동적 삭제'가 아니거든요. 조엘은 기억이 삭제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깨닫습니다. 치욕스럽고 아픈 기억조차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유기적 자산이었다는 것을요.
라쿠나 사의 직원들은 남의 소중한 기억을 지우면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춥니다. 그들에게 타인의 인생은 그저 지워야 할 '데이터 패킷'에 불과하죠.
이것은 감정 노동의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시스템은 이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심리 영역까지 침투해, 고통을 지워준다는 명목으로 수수료를 챙깁니다. 인류가 AI와 자동화 덕분에 단순 노동에서 해방되면 문화 소비가 늘어날 거라 예상하셨죠? 맞습니다. 하지만 그 문화 소비의 끝이 '나 자신의 역사를 삭제하는 서비스' 구매로 이어진다면, 그건 좀 소름 끼치는 미래 아닐까요? 고통을 견디는 '노동'조차 외주를 주는 꼴이니까요.
기억을 싹 지운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기차에서 다시 만납니다. 서로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들은 다시 본능적으로 끌립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건 '강박적 반복(Repetition Compulsion)'입니다. 상처받았던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다시 연출해 극복하려는 본능이죠. 기억을 지워도 무의식의 깊은 곳에 남은 '심리적 지문'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라쿠나 사의 서비스는 근본적인 치유가 아니라, 일시적인 분식회계에 불과합니다. 부실 자산을 숨겨놓는다고 해서 회사가 건실해지지 않듯,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그 사람의 결핍이 채워지지는 않으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은 서로의 최악을 기록한 녹음테이프를 듣고도 다시 시작하기로 합니다. "오케이(Okay)"라고 말하면서요.
이것은 완벽한 재무제표에 대한 포기 선언입니다. 인생에는 도저히 털어낼 수 없는 부채(고통)가 있고, 그것을 안고 가는 것 자체가 운영의 묘라는 걸 깨달은 거죠. 자본도 없고 코딩도 못 하는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버티는 힘은, 아마도 이런 '망가진 기억들'의 연대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한 줄 정산]
결론: 고통을 삭제한다고 행복이 입금되지는 않는다. 그저 당신이라는 계정의 로그 데이터가 소실될 뿐이다.
장단점: 이별의 아픔은 빨리 잊겠지만, 다음 연애에서 똑같은 이유로 또 차일 확률이 100%에 수렴한다.
한계: 세상에는 '삭제' 버튼보다 '백업'과 '복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뇌세포가 타버린 뒤에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