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도 빠지기만 할 뿐 흔들리지 않아

나를 성장시킨 자연현상, 탈모

by 키랭이

바람에 날리는 머릿결은 언제나 감성을 폭발시켜 버리는 마력이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코트 자락이 바람결을 타고 흩날리는 게 장관이다. 낙엽도 제법 폼나게 흩날리면, 없던 감성도 갑자기 끓어오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계 상위(?) 1%인 우리 탈모인들의 사정은 다르다. 코트 대신 고정해 둔 머리카락이 출렁거리고, 낙엽 대신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진다. 감성이 아닌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출처 : (좌)내가 발로 그린 것, (우)네이버 검색 결과 / 잘생기게 만든다고?


요즘 5:5나 6:4 가르마 파마를 한 남성들(이라고 쓰고 '일반인'이라고 부른다.)을 보면 참 부럽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바람 앞에 당당하다. 여기서 불어와도, 저기서 불어와도, 알아서 복구되는 자체 리커버리 시스템.


반면 나는 작은 바람에도 대책을 세운다.


흔히들 윗머리를 누르고 버틴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아니다. 윗머리를 누르면 주방 도마처럼 납작해져 버린다. "앞머리만 막으면 되잖아?"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틀렸다.


바람은 꼭 빈틈을 파고들어, 앞머리를 넘어 정수리까지 휘젓고 가버린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래서 나는 수년간의 연구 끝에 '아이언 돔 미사일 방어체계'도 한 수 접고 갈 '자체 방공호'를 개발했다.


ai 사진


손가락 한 마디 정도까지만 교차되도록 양손을 깍지 낀 후 양손 아랫바닥으로 옆머리를 딱 눌러 고정시키고, 정수리 위는 공중에 살짝 뛰워 고정시킨다.


제대로 되면 약지는 앞머리 직전까지 와 있고, 나머지는 정수리 위에 둥둥 떠 있다. '인간 헬멧 완성이다. 이것은 의외로 과학적이고 완성도가 높다.


바람의 특성을 알면 이해가 더 쉽다. 바람은 언제나 앞에서만 불어오지 않는다. 앞에서 불어온다고 앞만 막는다? 그럼 금세 바람이 방향을 틀어 왼쪽에서 불어온다. 그것뿐인가. 오른쪽, 뒤, 위... 사방에서 들이치고, 바람을 타이슨 뺨치는 동작으로 피하다 보면 '여자 친구'는 집에 가고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 나 이 남자 못 만나겠어..."


결국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이 바람을 가두리 양식처럼 잘만 모으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정상적인 데이트가 가능하게 된다. 데이트를 더욱 완벽하게 하기 위해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양쪽 겨드랑이를 계속 오픈해서 방공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할 수는 없으니 그녀의 시선을 좀 돌려야 한다.


"자기야"


"왜?"


"저기, 저~ 어기 불 빛 보여?"


전 여친(현 아내)와 데이트 때 찍은 야경

"아, 응"


"우리, 지금처럼 이렇게 거센 바람 불어와도 저 흔들리지 않는 불 빛처럼 함께 이겨내자"


와 같은 (뭔 말인지 자기도 모르는) 멘트를 날리며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결혼 N연차 이상은 주의!)




아직 머리숱이 제법 남아 있던 시절, 나는 아내와 두 번째 데이트로 황매산에 올랐다. 왜 하필 두 번째 만남에 산이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그래서 아내에게 늘 감사를...)


황매산에서 바라본 풍경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른 정상은 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평야지대 같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억새들이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내 머리카락도 저 억새처럼 버틸 것이라 잠시 믿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들(왜 안 뽑히냐)


하지만 시간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국 굵은 머리카락들은 대부분 빠져나가고, 얇디얇은 녀석들만 너른 들판을 지킬 뿐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 산을 찾은 건, 장모님과 아내, 아이와 함께였다. 그리고 모자와 함께(모녀 말고)


큰 바람에도 거칠 것 없던 시절이었지만, 지금 나는 작은 바람에도 대책을 세우는 사람이 되었다. 겉으로 보면 강박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작은 문제에도 해답을 찾는 습관으로 이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정이 있는 한 남자에게 꼭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딸과 아내가 있는 집의 가장이라면, 불확실한 바람 앞에서도 대책을 세우고 대비하는 것이 당연한 책임이 아닐까.


누구도 내게 이런 책임감을 강요하거나 가르친 적은 없다. 그저 자연의 바람이, 탈모라는 현실이, 아주 은근하게 나를 훈련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탈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겪지 않았다면 몰랐을 세심함과 책임감을, 탈모 덕분에 알게 되었으니까. 나를 단련시키고 성장시킨 건, 다름 아닌 이 소중한 자연 현상이었으니까.


아내가 '그것이 알고싶다' 미제 사건 처럼 나왔다고 해 휴지통에 들어가 있는 사진 재소환 (참고로 우리 둘은 그알 마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