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깡 연쇄 파괴범

부족하지만 풍성했던 지난 시절 - 1

by 키랭이

※ 바리깡 : '이발기'라는 순화어도 있지만 저의 문학적인(?) 표현을 위해 사용함을 알려드리며 양해바랍니다.



바리깡 살인마라 불렸던 남자. 한 번 걸리면 헤어(hair) 나올 수 없다던 울창한 숱(숲 말고). 심지어 찰랑거리기까지 하며, 따사로운 햇빛이라도 지나가면 검은 모래 위에 갈치 마냥 은색 빛깔이 반사되어 눈을 부시게 하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생후 12년 차 때였다. 한 세기의 10퍼센트 이상을 살다 보니 이제 미용실도 혼자서 갈 만큼 꽤 어른스러워졌던 나였다. 집에서 꼬깃꼬깃 받은 천 원짜리 몇 장 들고 미용실에 앉아 있으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미용실 선생님들은 대략 5명 정도 되었고, 일을 막 배우는 누나까지 하면 7명은 되어 보였다. 머리 위에 비닐을 씌우고 잡지를 보거나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은 못해도 네 다섯 명은 되어 보였고,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암만 잡아도 그 좁은 공간에 20명은 더 있었지 싶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언제부턴가 미용실도 혼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키랭이 왔네, 쌤! 키랭이 왔어."

"응 응, 알겠어~ 일루 와 키랭~ 오늘도 예쁘게 해 줄게~"


그렇다. 나는 이 미용실 연습용 마네킹이었다. 살아있는 마네킹. 언젠가 실장 누나가 내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말이 모델이지(그, 왜 걸어 다니는 모델 말고), 그냥 누나들의 실습용 인형이다. 대신 나는 돈을 내지 않고 머리를 자를 수 있었기 때문에 '누나 좋고 내만 좋은' 아주 괜찮은 거래였다. 지금도 엄마는 나의 뒷골목 거래를 모른다.


"이야~ 키랭이 머리 진짜 빨리 기른다. 무슨 애가 이렇게 빨리 기르니?"

"그러게요. 하하"


그래! 맞다! 머리까지 빨리 기르는 탓에 실습하기 정말 좋은 교보재였다. 옆머리에 조금씩 나 있는 새치가 조금 있긴 해도 찰랑 거리며 빨리 기르는 내 머리만큼 좋은 교보재도 없었다. 심지어 스타일도 아주 무난한 초심자용 모델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헤어스타일을 만드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나의 어린 시절 헤어스타일은 일관되게 바가지 머리였다.


외할머니집 옆 밭에서 찍었던 사진 스웨터는 엄마가 만들어줬었나?


그러다 보니 옆머리와 뒷머리 바리깡 사용, 앞머리 가위 사용 등 아주 기초적인 기술을 습득하는 데에 아주 최적화된 머리였다.



몇 개월을 그렇게 모델활동(?)을 해가며 열심히 부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평소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시던 실장 누나 내 머리를 만져주겠다며 붙었다. 모델은 아니었고, 그냥 자르러 갔던 날이어서 실장 누나가 잠시 쉬러 온 것이다. 나와 같은 동에 살던 누나는 팔이 아프거나 피곤할 때 가끔 내 머리를 잘라주었다. 초등학생이랑 이런저런 농담 따먹기나 하며 손을 움직이는 게 조금은 더 편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바빴던 그 시절 미용실이었으니까.


실장: "키랭아, 오늘도 머리 엄청 많이 자랐네, 숱도 너무 많다."

키랭: "아하하, 그렇죠 누나?"

실장: "그래, 근데 나 너처럼 머리카락이 이렇게 센 애는 진짜 처음 봐. 뭐 먹고 머리가 이렇니?"

키랭: "그러게요. 하하하"

실장: "오늘은 내가 머리 공ㅉ... 앗! 어?"

키랭: "???"

실장: "아! 잠시만, 미안 잠깐만, 아! 이거 왜 이래? 원장님~"

원장: "왜? 무슨 일이야?"

실장: "바리깡이 이상한데요? 이게 왜 이러지?"

쌤1: (머리하다 말고)"실장님 무슨 일이에요? 고장 났어요?"

쌤2: (머리 하다 말고2)"머리에 끼인거 아니에요?"

아주머니1: "머꼬 머꼬?"

원장: "아나~('여기'의 사투리) 가위 받아라"

실장: (땀을 흘리며)"키랭아 미안한데, 이번에 머리 좀 짧게 하자"

키랭: (키랭둥절)"네, 누나 저 괜찮아요"


싹둑


몇 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원장님과 실장 누나는 잠시동안 바리깡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실장 누나가 나에게 왔다.


"아... 바리깡이 부서졌어... 20만 원 주고 산 건데..."


금액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절치고는 엄청난 가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누나... 죄송해요..."

"응? 아니, 너는 머리 깎고만 있었는데, 죄송할게 뭐 있어. 하하하 괜찮아"


실장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고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들렸다.


4주 정도 지났나. 4주간의 조정(?) 기간을 거친 나는 다시 미용실을 찾았다.


"누나~ 저 왔어요~"

"응~ 밥은 먹었어?"

"네~ 라면 먹었죠~"

"밥 먹어야지 밥~"

"엄마 일하러 가서요~"

"어? 누나 그 바리깡 못 보던 거네요?"

"아 이거? 전에 고장 난 거는 못 고쳐서 버리고 다시 하나 샀어. 이번에는 좀 센 거라서 아마 괜찮을 거야. 오래 써야지. 그나저나 너 머리 진짜 세네. 관리 잘해야겠다. 부럽다 부러워 얘"


나는 어른들이 숱 많고, 머리카락 굵은 걸 왜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고 또 칭찬까지 하며 부럽다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20년도 더 지나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지만...


"전에 짧게 깎았는데 또 많이 자랐네. 아이고~ 보자 오늘은 바리깡이 잘 되겠지!"

"네, 그럼요~! 전엔 죄송했어요."

"아니 아니 괜찮다니까 참, 자 그럼 잘라보자"

"네! 누나"



10분 후...








"누나... 죄송해요..."


그렇게 실장누나는 두 달 사이에 꽤 잘 나가는 바리깡 두 개를 동시에 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풍성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보다 더 가진 것 없던 그때 그 시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풍성함말이다.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그 시절의 향수와 돌아갈 수 없는 젊음, 생기, 건강, 건강한 모발까지. 가진 게 너무나도 많았던 지난 시절이었다.


지금은 다른 면에서 잃어가고 있다. 건강과 젊음, 모발은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잔혹하지 않다. 직업이 생겼고 보금자리가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와 딸이 곁에 있다.


잃고 얻는 자연의 순리는 상처만 남기지 않고 회복과 치유를 통해 새로운 기쁨을 선물한다.





아직 건강하게 계신다면... 물론 그랬으면 좋겠지만, 실장누나는 은퇴를 앞두고 계실 나이일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될 때 즈음 누나는 이사를 가며 떠났고, 나도 아직 어려 바리깡 하나 못 사드린 게 아직도 너무나 죄송스럽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은 바로 채우는 일이다. 나도 누군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들의 부족을 채워주면 그들과 나의 삶 또한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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