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생기면 알게 되는 것들

[기획자의 육아] 사라지는 육아의 공유지에 대하여

by 비노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가장 달라지는 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종종 듣게 된다. 대개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언젠가 자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한 생명의 탄생이라는 거대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과연 적자일지 흑자일지 미리 가늠해 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를 통해 얻게 되는 기쁨이든, 그 과정에서 잃게 되는 삶의 일부든,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될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게다가 그것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끝내 알 수 없는 종류의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짧게 "더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그것이 내 솔직한 감상이기도 하고, 육아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있다는 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공통적으로 증언해 온 바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것만이 삶의 구조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아이가 생기는 것은 단지 내 삶의 자원을 타인을 위해 더 많이 내어주는 것도, 아이의 탄생과 함께 내 마음가짐이나 사고방식이 갑작스럽게 달라진다는 뜻도 아니다. 사실 아이가 생기면서 달라지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다. 아이와 함께 겪게 되는 모든 환경들, 이를테면 길의 경사와 보도의 턱, 낯선 사람의 시선, 공기의 질, 내 아이가 뛰어갈 때 어디까지가 안전한지 같은 것들이 모두 ‘내 몸의 문제’가 된다. 그것이 아이를 낳은 뒤 가장 크게 달라지는 지점이다. 더 이상 삶의 시선이 오직 나를 기준으로만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자면, 나는 육아를 통해 과거에는 개념으로만 알고 있던 한 단어가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 단어는 바로 '인클로저(Enclosure)'이다.


본래 이 말은 15세기 이후 영국에서 기업이 공유 경작지나 목초지에 기업이 울타리를 치고, 그것이 대규모 농장이나 목장으로 사유화되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누구나 함께 쓸 수 있던 토지 혹은 서비스가 경계와 소유로 재편되는 것에서 나아가, 공공이 공유했었던 요소들이 사유화되고 상품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아이를 키우며 불현듯 이 단어가 떠오른 데는 이유가 있다. 육아를 하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나의 부모는 도대체 나를 어떻게 키웠을까"라는, 경외와 의문이 뒤섞인 의문을 갖게 된다. 그것은 육아 자체의 고됨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자라던 어린 시절과 지금 내 아이가 놓인 환경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물론 과거는 쉽게 미화된다. 나 역시 아직 충분히 오래 생각해 본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럼에도 환경적 조건만 놓고 비교해 보면, 나는 지금 내 아이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며 자랐다고 느낀다. 골목이나 놀이터에서 처음 보는 아이와 뒤섞여 뛰어놀던 일, 예측할 수 없는 작은 위험 속으로 몸을 던져 보던 일, 아이들끼리 규칙을 만들어 함께 놀던 일, 부모들의 커뮤니티 곁에서 또 다른 아이들의 커뮤니티를 자연스럽게 만나던 일, 특별한 이유 없이 서로의 집에 초대되고 호의를 주고받던 일, 그렇게 세상을 조금씩 배우며 크고 작은 성취감과 함께 사회성을 익혀 가던 일들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일들이 너무 많은 조건과 비용을 요구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고 느낀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은 흔히 공동체주의적 육아 제도에 대한, 아이 중의 요구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그보다 훨씬 무거운 함의를 담고 있다. 한 인간의 성장은 가정과 제도 교육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속한 사회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자연은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수한 상호작용이 함께 필요하다. 아이는 미숙하고, 호기심과 본능이 앞서는 존재이지만, 반복되는 놀이와 적절한 안전이 보장된 공동체적 경험 속에서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를 몸으로 배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이를 존중하고 기꺼이 돕고자 하는 공적인 감각뿐 아니라, 아이들이 잠시 세상의 일부를 점유해도 괜찮고 내 주변에 함께 있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곧 공유지에 대한 감각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육아의 공유지'가 남아있는지를 묻게 되는 장면이 점점 늘었다. 예컨대 놀이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는 물리적으로 열려 있을 뿐, 정말로 바깥과 공유되는 공간으로 여겨지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단지의 놀이터가 입주민 재산의 연장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단지와 단지는 브랜드로 구획되고, 배제의 논리로 관리된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놀았다는 이유로, 아파트 주변 학교에서 운동회로 인한 소음이 발생했다는 이유로 민원이나 신고까지 이어졌다는 소식도 드물지 않다. 누군가는 놀이터나 학교 주변의 공간마저 배제 가능한 사유지로 받아들이고, 이를 소음으로 침범하는 일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의 놀이일지라도 말이다.


공동체로서의 육아는 더 이상 아이를 내 울타리 바깥으로 내어 놓을 수 없는 여러 이유들과 함께 점차 상업화된 수단으로 대체되고 있다. 서로가 아이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공유할 수 있는 놀이터가 없어지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키즈 카페가 생겨났다. 가족이나 사회적 공동체가 감당했던 집단 육아는 가족이 파편화되고, 맞벌이로 부모의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됨에 따라 이제는 어린이집이 대체하고 있다(물론 가족에 대한 의존이 어느 정도 늘어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이의 안전에 대한 공동체적 보호는 이제 기기와 서비스들이 감당하고 있고, 아이가 숲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주 값비싼 교육법을 가르치는 단체에 가야 하며, 육아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일은 조회수 비즈니스나 집단적인 상업행위가 잔뜩 낀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흐름은 비단 어떤 기업의 욕심때문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클로저는 삶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성향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는 맞벌이가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 되어버린 경제적 어려움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육아의 인클로저를 만드는 주체는 다름아닌 우리의 이웃이기도 하다. 사유지를 침범하는 소음의 공포, 아이와 아이, 그리고 아이와 세상 사이에 생긴 갈등의 비용, 피해 경험의 누적 속에서 육아는 '권리'가 아닌 '침해'로 인식되기 쉽다. 이런 충돌을 단순히 개인의 악의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육아를 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화된 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육아의 공유지를 살아남기 어렵게 한다. 물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결국 각 가정이 가장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책임의 감각이 책임의 고립으로 변할 때 생긴다. 육아를 철저히 각자의 몫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부모는 도움을 요청하는 일조차 미숙함의 고백처럼 느끼게 되고, 이웃은 타인의 아이를 함께 돌보는 일을 선의가 아니라 불필요한 개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날 일부가 보이는 육아에 대한 이기주의적인 태도조차도, 육아가 개인의 몫이라는 인식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게 육아는 협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문제가 되고, 공동체는 돌봄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서로의 부담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계의 집합으로 바뀐다.


바로 그 지점에서 육아의 공유지는 무너진다. 공유지란 누구의 것도 아닌 땅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쓰기로 합의한 세계를 뜻한다. 아이가 골목에서 뛰어놀고, 놀이터에서 낯선 아이와 어울리고, 어른들이 그 모습을 완전히 통제하지 않은 채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던 풍경은, 실은 아주 두터운 사회적 신뢰 위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신뢰를 잃은 자리에 예약, 결제, 규칙, 감시, 후기와 평점 같은 장치들을 대신 세워두었다. 함께 키우는 감각이 사라질수록, 육아는 점점 더 비싸고 피곤한 일이 된다.


그래서 오늘날 육아의 위기를 단지 출산율의 문제로만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아이를 어떻게 더 낳게 할지"와 "보육을 무엇으로 대신할지"라는 질문은 이미 사람들의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누가 우리를 도와주는가?" 라는 냉소에 묻히기 너무 쉽다. 이보다 앞서 물어야 할 것은 아이를 낳은 뒤의 세계가 과연 함께 감당 가능한 구조인가 하는 점이다. 육아가 한 가족의 체력과 경제력, 정보력에만 의존하는 일이 된 사회라면, 그 사회는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동시에 양육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비슷한 시기에 자녀를 얻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나는 그들로부터 힘을 많이 얻고, 그들도 우리를 통해 힘을 얻노라고 말한다. 함께 공유된 공간 속에서 노는 법을 배우고, 또 육아의 노하우들을 알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배려하는 일들이 아직 어떤 곳에는 남아있기도 하다. 육아의 공유지가 지친 부모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다.


코로나로 인해 미뤄진 결혼과 출산이 늘면서 출산율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출산으로 인해 사회가 무너질 것이라는 공포에 기대는 것, 혹은 전통적인 의무감 뒤에 숨는 것도 아니고, 상품화된 모습을 대체하는 더 많은 양육 서비스만이 아니라, 다시금 육아를 공동의 일로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공간과 규칙, 그리고 관계의 복원을 통해 진정으로 육아, 그리고 가족, 나아가 사회라는 집단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어떻게 다시 만들어갈 것이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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