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여름
진실과 폭력
난 언제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모두에게는 아니고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만큼은. 내 안에 올곧은 정의를 증명해 내는 그런 류의 진실이 아니라, 어둑한 방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려주길 기다리는, 두드리기만 하면 언제고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외롭지만 단순하고, 솔직하고 또 겁 없는 진실.
하지만 종종 그런 기회가 생겨 속에 있는 말을 풀어내 보려 해 봐도, 왜인지 그럴 때마다 완전한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떤 진실에 관해 말하기를 시도하고 번번이 실패하고 나면, 결국 '말했다'라기보다는 '하나의 진실된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가까워졌다' 정도로 결론지어지고, 그 뒤엔 일련의 경험이 기억 속에 남곤 한다. 오래 고여 있던 못의 침전물들이 사소한 움직임으로도 부유하듯이, 무엇인가 심연으로부터 일순 솟아올랐다가 다른 것들 틈에 섞여 들어 마구 혼잡해졌다가 다시금 서서히 가라앉으며 고요해지는.
아무래도 난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진실을 말하기를 욕망하는 사람이지 그걸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말하고 보니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진실을 말해 본 적 없는 것 같다. 설사 그랬었다 하더라도 뚜렷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진실의 언저리 즈음을 말하고, 별다른 동요 없이 금세 잊었을 확률이 높다.
'모든 이야기들이 내 생각의 틀에 알맞게 맞추어지지는 않지만, 생각해 보면 삶이라는 것의 본질이 그러하고, '
이 문장을 봤을 때 나는 진실의 끝까지를 파고들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순간순간 머리를 치는 무의식이라든가, 메시지를 교묘히 다르게 전달하거나 애써서 부정하는 말들의 이면 같은 것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진짜 진실. 진짜 진짜 진실. 그런데 진실을 말한다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말할 수 있는 만큼만의 진실, 상대의 이해 범위 내에서 수용 가능한 정도의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네가 편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날 것 그대로 진실에는 모종의 폭력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 만큼의 자기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상대를 해하지 않을 만큼의 상대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는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천착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
'폭력'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곱씹으면 그날 밤 일이 떠오른다. C에게 진실을 말했던 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실의 아주 극히 일부를 이야기했던 날. 나는 충동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진실을 말한 건 새벽이었고, 아침이 밝자마자 그 사람은 나를 떠났다. 내 곁을 떠나겠다고 선언을 하고는 떠났다. 슬프고 웃겼다. 겨우 그 정도의 진실을 알고서. 그날 아침엔 볕으로 사방이 온통 환했는데, 어색하게 마주 앉아 밥을 먹는 틈에 C는 시종일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고, 대화 중에 혐오의 뉘앙스를 취하기도 했다.
헤어짐 이후 보내온 텍스트에서 C는 내 선택을 '잘못'이라고 명명하며 부정하고 비난하고 저주를 했다. 내가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내게 당장 모든 일을 바로잡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것 또한 나였고, 내 삶이라고 여겼으니까. 이제와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내가 온갖 불안과 두려움을 껴안고서 누렸던 자유와 행복, 충만함과 생생함의 시간들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한때 내가 모든 걸 잃고서라도 반드시 지키고자 했던 절실한 무엇이기도 했다.
바로 이 문장. 이를테면 이런 것이 진실이 아닐까. 내가 지금 발 붙이고 있는 사실과 과거의 기억들에 기반한 진실. 내 경험을 돌이켜 보면, 대부분은 —적어도 내 주변인들은— 내게 진실을 말할 때 자신에게 귀속된 진리를 대변하거나 호소하고는 했다. 너는 '판단을 유보한다'는 재밌는 표현을 썼지. 이 말이 재밌게 여겨졌던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거나 보류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추종하거나 부추기기 바쁘지. 더 재미있는 건, 그들이 요구하는 진리를 나는 늘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진리와 관계(sex) 하지 않을 뿐. 어쩌면 이런 점이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일 수 있는 순간을 가로막는 주범이 아닐까.
더 이상 L은 내 곁에 없고, 아직도 난 가끔 C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게 다다. 그 어떤 과거의 결론과도 타협하지 않는다. 모든 게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체념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나를, 내게 주어진 삶의 아이러니를 옹호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꿈
매일 다른 기억들이 뒤죽박죽 떠오른다. 기억이 감각을 몰고 오는 날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그리워하면서 평소보다 자주, 더 오래 담배를 피운다. 눈을 감으면 기억 속 사람들이 꿈으로 찾아든다. 눈을 뜨면 꿈에 있었던 사람들을 다시 기억한다. 뒤에 일이 먼저 일어나고, 앞의 일이 나중일 때도 있다. 어쨌거나 매일이 그러한 일들의 반복이다.
미워하거나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꿈에서 나는 주로 연약한 존재다. 속수무책으로 끔찍한 일들에 휩싸이고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사건들을 겪는다. 그러다 아주 드물게 내가 누군가를 해하는 입장이 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저도 나는 꿋꿋하게 모질지 못하고 상처를 주면서도 똑같이 상처를 입는다. 단 한 번도 내가 완벽하게 강한 인물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 꿈을 꾸는 때가 과연 올까?
나는 사람들에게 꿈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이다. 어떤 꿈을 꾸더라도 꿈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역시 꿈이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 인정하기 때문이고, 그래서인지 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왜인지 내 무의식이 까발려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꿈은 내가 통제하고 짓밟는 상념까지도 기어이 끄집어내 발현하기도 한다. 가끔 꿈에서 마주하기 두려운 어떤 진실과 맞닥뜨릴 때면, 거기엔 늘 고통으로 죽어가는 내가 있다.
불면. 언제부턴가 잠에서 깨는 습관이 생겼다. 운이 좋아야 깊은 숙면에 들고 대부분의 날들은 잠듦과 깨어나는 패턴의 연속이다. 사람들이 그걸 수면의 '장애'라고 부른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아마 기다림의 흔적인 것 같다. 한때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선잠에 들고, 불안감 또는 기대감에 번뜩 깨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던 습관이 있었다. 그걸 오래 반복하다 보니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어도 내 잠은 습관처럼 기다림의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 아니 어쩌면 더 오래된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기다림 이전의 기다림.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것만 같다.
아침이 되어 거울을 보면 내가 너무 늙었다는 생각에 괴로워진다.
윤희에게
종종 M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곤 한다. 문득 한 시절을 상기하게 하는 계기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윤희에게>가 그랬고, 최근에는 <너와 나>가 그랬다. 말 그대로 생각이 날 뿐,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구태여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더군다나 이제는 서로가 너무 다른 세상에 있다고 느낀다. 윤희와 준보다도 더 멀리. '용기'라고 너는 말했지만, 용기와는 좀 다른 문제라고 난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된 후로 용기를 내야 한다는 어떤 마음에도 사로잡힌 적이 없으니까. 내가 그리워하는 건 시간이지, 관계의 회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덧붙여 말하면 너와 내가 멀어져 있을 때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시간인 동시에 관계의 회복이었다.
글쎄. 나는 체념하기까지가 어려운 사람이지, 막상 체념을 하고 나면 모든 것이 간단하고 명료해지는 것 같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오래전에 나를, 우리를 버리고 떠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하며 체득하게 된 일종의 삶의 방식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마치며,
할 수 있는 말을 다 하고 나니 서러운 마음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