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죄책감이 나의 결심을 가로막을 때
부부 상담을 받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집에서 점심을 챙겨 먹고, 우리는 손을 잡고 나란히 상담을 받으러 갔다. 간단한 사전조사 질문지와 각종 개인정보 동의에 서명을 하고, 작고 조용한 방 안에서 우리는 첫 부부상담을 시작했다.
우리는 차분히 우리 상황을, 그리고 각자의 입장을 설명했다. 우리 얘기를 찬찬히 들어보신 상담 선생님은 의아해하셨다. 부부상담 전문가인 선생님도 우리 부부와 같은 상담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보통 부부상담을 하면 두 분이 자기감정을 앞세워서 다투거나, 관계가 상한 상태로 온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겉으로도, 속으로도 다툼이 없었다. 대체 왜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우선은 각자의 얘기를 들어보고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고, 개별상담을 진행했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 입구에서부터 울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어요.”
선생님은 개인면담의 시작에,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상담을 하기 전부터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니, 요즘 내 표정이 어땠는지를 되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이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눈물이 났다. 이대로는 우울에 빠져버릴 것 같아, 내가 먼저 상담도 제안했다. 그런데 상담은 온통 아이 얘기뿐이었으니, 시작도 하기 전부터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을 수도 있겠다.
개인상담은 주로 아이를 왜 낳고 싶지 않은지에 대해 내 감정과 주장을 설명하고, 아이를 낳은 상황과 낳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보는 식이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이유에 대해 꽤나 많은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할 수 있었다. 아이를 낳았을 때의 내가 느낄 고통스러운 감정들도 비교적 잘 말할 수 있었다. 함께하는 세션에선 남편이 주도적으로 말하도록 말을 아꼈지만, 개인 세션에서는 보다 편하게 내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듣고 있다가, 한마디를 하셨다. “이렇게 조목조목 잘 말할 수 있는데, 왜 막상 남편에게는 이렇게 말을 못 했을까요?”
대답을 생각하던 도중, 나는 남편에게 대한 내 감정을 요약하는 단어를 찾았다. 죄책감. 내가 아이 없는 삶을 더 원하게 되면 될수록, 남편의 기대와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남편이 느낄 아이에 대한 결핍은 나로 인해 생긴 결핍이라는 것. 남편의 행복을 영원히 뺏어버리는 것 같다는 점. 내가 느끼는 애정과 행복이 커질수록,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아이 없는 삶을 희망할수록, 이를 원하는 남편에겐 더욱 말하기가 어려웠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멈추었다. 남편의 입장을 너무 많이 상상해 본 것 같아요. 아직 우리는 얘기해보지 않아서, 남편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어디에 있을지는 남편의 마음속에 있어요.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 상상하시는 만큼 불행할지 알 수 없어요. 그건 대화를 나누어보아야만 알 수 있어요. 우선은 내 의견과 죄책감은 좀 분리해야 할 것 같아요. 나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과연 내 의견을 잘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를 대변해야 하는 것은 결국 나다.
나는 오랜 시간 나를 위해 공들여 내 생각을 정리해왔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모두 내 머릿속을 맴돌고, 남편에겐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말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남편이 아니라 나의 죄책감이었다. 남편이 받을 마음의 상처를 상상하며 내 자신이 나를 막았다. 결국, 내 입장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나를, 내 스스로 막은 셈이다. 아무도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 나를 대변해야 하는 것은 결국 나인데,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내 입장을 지켜주지 않는다.
상담을 받고 난 이후, 내 마음은 조금 결연해졌다. 내 선택은 남편도, 부모님도, 지금의 사회도 그다지 환영하는 선택이 아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내편이어야 하고,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조금 더 분명하게, 조금 더 선명하게 내 입장을 얘기하자. 나를 지켜야 하는 것은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