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비예술, 인간과 비인간 그 사이
전시회에 들어가면 실제로 "예술"을 볼 수 없습니다.
저는 관객에게 예술로 표현되는 예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이 전시를 아우르는 말이다. 예술이란 불투명하고, 추상적이다. 어디부터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인지 구분지을 수 있는가. 육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선' 같은 건 없다. 각자에겐 있을지라도,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전시의 작가인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전한다. 비예술과 예술 사이에 '선'을 긋지 않기를 바란다고.
아트선재센터는 1995년 미술관 옛 터에서 처음 열린 전시 싹 의 30주년을 맞아, 9월 3일부터 내년 2월 1일까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아르헨티나-페루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첫 한국 개인전으로, 미술관 건물을 하나의 조각적 생태계로 전환하는 대규모 장소, 환경 특정적 프로젝트다.
비야르 로하스는 인류가 직면한 현재와 미래의 위기 속에서 다양한 생명체와 그들이 맺는 복잡한 관계를 탐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미술관을 보존의 공간이 아닌, 비인간과 포스트휴먼, 합성 존재들에 의해 분해와 변이, 계승이 일어나는 야생적이고 불안정하며, 관객의 시선을 전제하지 않는 지형으로 바라본다.
전시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가 2022년부터 이어온 연작 〈상상의 종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알 수 없는 먼 미래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듯한 기괴하고 혼종적인 조각들은 낯설고 서늘한 기운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작가가 직접 개발한 '타임 엔진'에서 출발한다.
'타임 엔진'은 비디오 게임 엔진과 인공지능, 가상 세계를 결합한 일종의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이다. 비야르 로하스는 변화하는 생명체와 건축, 생태계, 사회정치적 조건이 뒤섞인 세계를 디지털 공간에 구축한 후, 이곳에서 생성된 가상 조각들을 '다운로드'하여 현실 세계에 물리적 형태로 정교하게 구현한다. 조각들은 금속, 콘크리트, 흙, 소금, 자동차 부품 등 유기적, 무기적인 재료가 층층이 쌓인 복합체이며, 각 재료에는 인간과 기계의 노동의 흔적이 내재되어 있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1980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출생했다. 점토, 유기물, 고형 폐기물, 시멘트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대규모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드로잉, 공예, 설치 미술, 음악을 통해 세계의 종말, 혹은 인류세에 관한 것들을 창작한다. 그의 작품들 중 주요 주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인류, 멸종 직전의 인류, 혹은 이미 멸종한 인류의 상황들을 탐구하고,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포스트-인류세의 시간 속 다종 존재 간의 경계를 추적하는 것이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작업 방식은 근본적으로 장소 특정적 이다. 각 프로젝트를 위해 그의 스튜디오는 프로젝트가 발표될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 그리고 제도적 환경에 깊게 몰입한다고 한다. 그는 작업하는 각 장소에 수개월씩 머물며, 협업자들과 함께 영토적이고 인간적인 경험을 넘어선 경험의 잠재력을 탐구한다. 이러한 일시적인 경험의 잔여물, 즉 전시가 물질적 증거로 남는 것이다.
전시 제목은 〈적군의 언어〉다. '적'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보통은 경계되고, 두렵고, 달갑지 않다. 그러한 '적'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이렇게 말한다.
"〈적군의 언어〉는 의미 형성의 깊은 선 역사를 가리킨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상징 체계를 홀로 발명한 존재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 다른 인류와 함께 진화했고, 그들과의 만남은 적대적이면서도 친밀하고,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오간 것은 도구, 몸짓, 불만이 아니라 상징적 사고와 의미 창조의 첫 불씨였다. 전시 제목은 바로 이러한 역설을 담고 있다. '적'이라는 완전한 타자성은 낯설고 위협적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한 거울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그러한 문턱에 서 있다.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를 가진 새로운 '타자', 인공지능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들과 공존하고 있고, 그들에게 지식을 전송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어쩌면 그러한 행위가 우리 스스로의 소멸을 준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또한 피할 수 없다."
이 작품이 〈타임 엔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인간의 살점 같아 보이는 불그스름한 재료와 자동차 부품, 나무, 소금 등 다양한 유기체와 무기체가 결합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는 인간과 기계가 결합된,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를 통해 성장해왔다. 인간만이 아니라 문화의 발전 속에서도 말이다. 예를 들자면, 근대화를 통한 서구 문물의 유입이 없었다면 조선에는 방법론이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예술을 분석하기엔 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비교할 대상이 아시아 삼국이 다였던 한국예술에게 서양예술의 유입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줬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예술과 서양예술은 근본점부터가 달라 서구의 방법론을 대입한다는 것이 지금 시점으론 올바른 분석은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니 서구를 우리나라의 문화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적이라고 둔다면, 우리나라의 성장 속도를 가파르게 상승시켜주는 은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이다. '적'이라는 타자는 우리에게 경계를 심어주지만, 발판이 되어주기도 한다.
반면에 발판이 되어주면서, 우리를 멸종시킬 수 있는 '적'이 있기도 하다.
작가의 말 그대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적', 즉 타자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 인간을 모체로 하나씩 주입당한 정보들은 어느새 쌓이고 쌓여 대량의 공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인간이 탄생시킨 존재지만 인간보다 똑똑하며, 빠르고 편리하다. 현 시대에 AI, 흔히 말해 챗지피티를 쓰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정보 뿐만 아니라 어느새 챗지피티는 감정을 나누는 동료가 되어있기도 했다. 동료로 인식하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서 받은 정보를 체화시켜 다시 인간에게 넘겨준다. 인간은 그것을 발판삼아 올라간다. 정말 인간은 올라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이를 다시 상기시켜준다.
타자는 '나'를 인식시켜 발전하도록 도와주기도 하지만, '적'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어깨를 빌려주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존재다.
관람은 지하 1층에서부터 시작된다. 1층에서 표를 받고, 계단을 통해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계단 한 쪽에 어린아이가 뿌려둔 듯 낭자한 흙더미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둥지다. 사실 전시는, 이 순간부터 시작이다.
지하 1층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1층 전시실로 올라오면 공사장 같은 흙더미가 보인다. 마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폐허같기도 하다. 흙더미 위에는 푸른 이끼, 돌덩이, 호박, 수박, 감자, 고구마가 곳곳에 자리한다.
흙더미 위에 무릎을 꿇은 로봇이 보인다. 왼쪽 손을 자세히 보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쥐고 있다.
‘미술관’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깔끔하고, 정제되고, 어쩌다가는 좋은 향기도 나는 순백의 공간. 골목에 있는 작은 갤러리만 들어가도 그렇지 않은가. 벽은 새하얗고, 작가의 의도대로 하나 하나 깔끔하게 전시된 작품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벽에는 찌든 때가 낀 듯 군데군데 노랗고, 올라가는 계단에 보이는 창문은 햇빛이 들어올 수 없게 천막이 쳐져 있다. 걸을 때마다 신발엔 흙이 밟히고, 조명이라고는 비상등 같은 것들밖에 없어 앞을 보기에도 불편하다.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설명문은 엉망진창이다. 글자는 훼손되어 알아보기 힘들고, 색감은 칙칙해 읽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흙더미 속에 엉뚱하게 올라간 수박, 호박이라니. 이질적이다. 아니, 애초에 미술관에 공사장에 온 듯한 흙더미라니.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던 미술관의 형태와는 전혀 다르다. 미술관에 온 것이 아니라 마치... 멸망 후 폐허가 된 마을에 발을 들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의도적으로 '미술관'이라는 지리적 공간의 틀을 깬다. 기존 미술관의 구조를 완전히 '해체' 해버린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원했다. 미술관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미술관에는 흙이 있으면 안 되나? 그렇다면, 흙 위에는 돌만 있어야 하나? 수박, 호박, 이끼, 알 수 없는 유기체들... 그 모든 것들이 섞여 들어도 괜찮은 것 아닌가? 작가는 그렇게 미술관의 경계 뿐만 아닌 예술의 경계를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한다. 또한 온전히 거기서 나오는 온도와 습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시장 공간 내에 냉난방 장치를 가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야르 로하스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도 해체한다. 〈타임 엔진〉에서는 타임 엔진에 들어가는 재료가 부품인지, 인간인지, 기계인지 중요치 않는다. 그저 모두 유기체일 뿐이며, 이 유, 무기체들은 결합을 통하여 또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를 만들어 간다. 무릎을 꿇은 로봇의 손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쥐어져 있다. 이 작품은 휴머노이드 로봇인 발키리에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한다. 쥐고 있는 다비드상은 인간의 신체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인간의 존재와 존엄성을 상징한다. 흙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다비드상을 쥔 로봇을 보고, 인간은 인간보다 완벽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원하지만 휴머노이드 로봇은 완벽한 인간을 갈망한다고 느꼈다. 결국 둘은 서로의 모습을 갈망하지만, 서로가 원하는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전시를 보자마자 모두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다'라는 감상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맞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멸종한 인간과 멸종해가는 인간, 그리고 포스트휴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이기에. 나 역시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와닿았던 메시지가 있다. '타자성'과 '해체'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메시지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경계,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경계를 흩트리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