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줘야지. 우리가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감동과 재미 그리고 뜻깊은 의미를 가진 최고 영화라는 것을 부정할 분은 없으시겠죠. <암살>은 우리 민족의 의미와 통쾌한 카타르시스의 대중적 재미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천만 관객이 선택한 웰메이드 영화입니다.
최근 과거의 일제의 만행을 사과하기는 커녕 부정하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자극했던 한 인간이 떠났기에 올리는 이야기.
아래 내용은 <암살>의 내용과 약 10% 정도의 관련이 있습니다.
<1>
함께 거사를 도모한 우덕순은 전역인 차이자거우 역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다음 역으로 이동하였다. 다행히도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역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왼쪽 가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권총의 한기를 손을 넣어 느껴보았다.
1909년 10월 26일, 내 생애 마지막 가을날.
그 놈을 태운 기차는 차이자거우 역을 정차하지 않고 바로 이 역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내 30년 인생의 목적과 이유를 설명해줄, 목숨을 건 거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시선을 떨구고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흘렸다.
『 이제 네 놈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렸구나. 』
저만치에서 그 놈을 태운 기차가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플래폼으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섬뜩한 검은 괴물 같은 기차를 보며 설레임과 기쁨이 어지럽게 뒤섞인 긴장이 온 몸을 휘감았다. 심호흡을 했다. 이 때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는가.
나는 그 놈의 얼굴을 모른다. 실패로 돌아간 암살 사건으로 자신의 사진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 그 놈의 정확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 터였다. 다시 한 번 동지에게 들었던 말을 되새겼다.
『 잘 기억하게. 그 놈은 코 옆에 점이 있어. 』
『 코 옆의 점... 』
멈춰선 검은 괴물은 러시아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많은 일본인 관계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의장대가 사열하고 수많은 환영인파가 모여 들었다. 코 옆에 점이 있는 50~60대의 남자를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하지만 얼굴을 모를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엄마를 잃고 갈림길에 선 아이처럼 어찌할지를 모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심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탄식을 뱉었다.
『 하늘이여... 이렇게...
우리 민족은 길을 잃는 것입니까? 』
그 때였다. 일본인 환영객 중 한 명이 웃으며 그를 불렀다.
『 이토 사마! 』
한 남자가 뒤돌아 환영객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코 옆의 점!
탕!
탕!
탕!
흉부에 한 발!
흉복부에 한 발!
좌측 복부에 한 발!
성공이다! 성공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에 우리 민족의 총알을 박았다!
나는 민간인이 많아 자폭을 하지 못하고 품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머나먼 타지에서 조선 민족을 향해 목놓아 부르짖었다.
『 까레야 우랴! 까레야 우랴! 』 ( 대한제국 만세! ) - 러시아어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 당해 사망합니다. 이토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메이지 유신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외교와 헌법의 토대에까지 19세기 말 일본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일본의 근대화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가 일본에서 21년간(1963~84)이나 1천엔권 지폐의 초상 인물이었던 것이 일본에서의 그의 위치를 잘 설명합니다.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 총 세 발을 맞고 응급 처치를 받으며 총을 쏜 자가 조선인이라고 하자 '바카나야쓰' (바보 같은 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토는 일본내 온건파의 대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강제 합병 및 무단 식민 통치를 주장했던 강경파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조선의 자치를 인정하고 부드러운 융화 정책을 선호했다는 이후 역사가의 평가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죽고 7개월 후인 1910년 경술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집니다. 그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조선의 조기 식민지화를 예상하고 안중근 의사를 '바보'라고 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한일 합방을 앞당긴 자충수였던 것일까?
이토가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2차 대전 등 일본에 의한 침략 전쟁의 발발과 지금까지의 일본의 대륙을 향한 야욕과 행보로 미루어 짐작컨대 조선의 식민지화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방향은 조금 달라졌을 수는 있겠지만.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을사조약으로 초대 조선 총감을 지냈던 이토를 저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조선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고 나아가 일본의 첨략 전쟁을 막아 세계 평화를 외쳤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조선 땅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전해지자 1910년대에만 6종의 안중근 전기가 출간되었고 그의 사진과 기념 달력·엽서가 발간될 정도로 나라 잃은 슬픔과 좌절 속에 묻혀 있던 백성들에게 환희에 찬 큰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게다가 1945년 해방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 투사들에게 좌표와 롤모델이 되어준 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조선 독립을 향한 투지로 발사한 일본의 국부의 심장에 꽂았던 세 발의 총알은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하얼빈 역에서는 저격 위치와 사망 위치를 도형으로 표시하여 당시의 의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한의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는가?
<2>
안중근 의사의 의거 1년 전인 1908년에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24살이 되던 1932년 백범 김구와 만났다. 청년 윤봉길 의사는 김구의 일본군 장교의 암살을 지시를 받는다. 그는 김구에게 말했다.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1932년 1월 일본은 상하이에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장제스(훗날 대만 초대 총통)의 국민당군을 공격하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항공모함과 폭격기를 동원한 일본의 무차별 폭격을 버티지 못한 중국 국민당 병력은 철수했다. 패전한 중국은 굴욕적인 중국군 비무장화 조약을 체결하고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분노와 슬픔으로 반일 감정이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한 청년의 마지막이 될 마지막 봄.
중국 홍커우 공원에서 상하이 사변의 승리를 자축하는 행사가 열렸다. 일본 주최측은 이전에 있었던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인해 위험을 인지하고 물통과 도시락의 반입만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윤봉길은 지체없이 준비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 중 물통 폭탄(도시락 폭탄이 아니다!)을 연단에 정확하게 던져 일본군 사령관을 비롯한 장교들을 깨끗하게 제거하였다.
하지만 준비한 물통 폭탄으로 일본 장교를 제거했지만 자폭용으로 준비한 도시락 폭탄이 불발하여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에게 잡히고 만다. (반대로 던졌다면... 큰일날뻔... 하늘이 돕다.)
윤봉길 의사는 이후 일본에 의해 총살당하였으며 일본은 그를 밟고 올라가라는 의미로 계단에 시신을 방치했다.
반일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인들은 한국 국내 친일파들과 일본에 의한 한국인의 강제 징용 등으로 한국인을 일제의 앞잡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단 번에 인식이 역전되어 함께 일본에 대항하는 동지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상하이 사변으로 자존심을 구긴 국민당의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 소식으로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하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일당백만인가...)
라며 극찬하고 직후 백범 김구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그리고 지원해주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 등 당시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카이로 회담을 통해 전후질서를 구상하며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내용이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한국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1차 대전 이전 엄연한 자주 독립 국가였던 '류큐 왕국'과 '조선' 중 류큐는 일본(현재 오키나와 현)에 남고 한국은 독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류큐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이야기하여 그것을 관철시킨 힘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윤봉길의 힘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그저 망명객들이 모여 내부 투쟁/분열을 일삼는 집단으로 여겨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 이후 물심양면으로 임시 정부를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카이로 회담 첫날인 11월 22일, 장제스는 일기에 ‘종전후 한국의 완전 독립과 자유의 건의 예정’ 이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① 그저 모여서 만세 부르는 독립운동이 우리 독립과 해방에 무슨 영향을 끼쳤겠어? 개죽음일 뿐이야.
② 주요 인사 한 두 명 죽이는 암살이 우리 해방에 도움이나 되었겠어?
③ 미국 때문에 해방되었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었어?
응?
과연 그럴까?
엄연한 자주독립국이었던 '류큐'는 독립을 향한 열망, 어떤 의지, 싸우고자 하는 투지도 없었기에 현재 그들의 나라를 기억하는 이 없이 세계 지도에 삭제되어 일본의 제 2시민으로 남게 되었고 한국은 전후 독립하여 한민족을 위한 이 땅에 뿌리내려 자랑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 저항, 준비가 한국의 독립을 만들었고,
'류큐'는 윤봉길이 없었지만,
'한국'은 윤봉길이 있었다.
작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 윤봉길 의사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3>
① 권위의 복종에 대한 실험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은 복종(obedience)의 속성을 연구하기 심리학 실험을 했습니다. 이 실험에서 연구진은 참가자에게 전기충격기를 주고 질문을 받는 옆 방에 있는 학생이 그 질문에 틀린 답을 할 때마다 참가자으로 하여금 질문에 틀린 학생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참가자에게는 이 실험이 학습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속였습니다.
물론 학생 역을 맡은 사람은 전기충격 고통을 '연기'하는 배우였고 전기충격기도 가짜였습니다. 실험참가자가 전기충격 버튼을 누를 때마다 학생 역을 맡은 배우는 소리를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때로 죽은 것처럼 반응을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구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험참가자에게 계속 전기 충격을 가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실험의 댓가는 4달러였고 15 볼트에서 시작하여 15볼트씩 올려 450볼트까지 올리게 하였습니다. 실험 전에는 3% 정도가 인체에 치명적인 300볼트 정도까지 올릴 것이라 예상했고,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리는 것은 0.1%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상했었지만...
놀랍게도 실험참가자들은 전기충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가자 65%는 전기충격량을 최대치까지 올렸습니다. 심지어 학생 연기를 하는 사람이 그만하라고 애원을 하며 울부짖어도 서슴치 않고 전압을 올렸습니다.나머지 35%도 적극적으로 실험을 저지하거나 죽은 것처럼 반응이 없는 학생을 도우려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단지 더 전기 충격을 가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염석진 (이정재 분)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그랬겠나!
② 친일파의 변신
최종병기 어린 시절 채시라, 최재성, 박상원 주연의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최종병기 어린 시절이라 스토리는 잘 기억 안 나지만 대략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즈끼(박근형 분)라는 창씨개명한 조선인 악질 고등계 형사가 있습니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잡아다 고문하고 죽이며 심지어 선량한 사람들까지 누명을 씌워 잡아 눈에 불을 켜고 실적을 올리는데 혈안인 사람입니다. 주인공인 장하림(박상원 분)도 가족을 스즈끼에게 잃은 피해자입니다.
1945년 제 2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장하림은 해방 이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다가 우연히 경찰서에서 매우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경찰서에서 여전히 부하들을 호령하며 지휘하고 있는 스즈끼를 본 것입니다. 분노한 장하림은 스즈끼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고 외칩니다.
『 스즈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해방이 되었어! 스즈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세상이 바뀌었어! 』
멱살을 잡힌 스즈끼는 당황하여 부하를 시켜 장하림을 끌어내도록 지시합니다. 스즈끼의 부하에 의해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장하림은 괴로움과 절망에 몸부림칩니다. 스즈끼는 끌려가는 장하림을 보고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합니다.
『 저런, 빨갱이 새끼! 』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보다 오히려 친일 조선인이 우리 민족에 더 악질적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창씨 개명하고 항일 독립 운동가를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더 악랄하게 잡아 고문하고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피해자는 늘 권력과 거리가 먼 빽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채 10대 초반의 나이로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들도, 강제 징용되어 이름도 모를 곳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던 소년들도 모두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친일파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친일파들이 일제시대 생계를 위해 친일을 했고 그 때는 다 그랬다며 천황을 칭송하고 강제 징용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일을 했던 그들은 상위 계층으로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민족을 팔았습니다. 정말 생계가 힘들었던 가난한 이들은 친일을 하고 싶어도 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로 이 땅에서 고통과 절망 뿐인 삶을 살아갔습니다.
위의 권위와 복종의 실험에서 보듯 2차 대전 당시 벌어진 나치의 잔악한 행위나 일제 강점기 완장 차고 제 나라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상부의 권위에 복종해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속성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되겠죠.
환경에 따라 인간의 잔혹한 인간성이 드러나며 민족을 반역하고 그로 인해 다수의 서민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는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이 땅에서는 친일 -> 반공 -> 독재 등 강자에게 붙어 바람 부는대로 기회주의자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반성도, 사죄도 없이 해방이 될 줄 몰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도리어 큰소리 치는 뻔뻔한 철면피와 제 나라, 민족을 위해 차가운 총을 빼들었던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통쾌한 배신자의 최후와 정의의 승리, 그동안 가려웠고 불편했던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 영화 <암살>입니다.
<암살 - 알려줘야지. 우리가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 written by 최종병기, ⓒ 최종병기
병맛나는 삼류 쌈마이 글, 자유롭게 퍼가셔도 좋지만 출처는 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