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 아멜리 노통브의 갈증
예수 시점에서 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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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구경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책표지, 제목이 특이했고 심지어 옮긴이 이름까지 '이상해' 인 것이 독특하길래 호기심이 생겨서 읽기 시작했다. 읽어보니 예수 최후의 날을 예수 시점에서 쓴 소설이었다. 굉장히 재밌었다. 일단 이 소설은 예수를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과거에는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주장했지만 현재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고 믿어진, 예수라는 이름의 이스라엘 사람이 실존했다.' 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아무래도 아는 만큼 더 잘 보일 테니까, 성경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으면 더 재밌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상식적인 부분이 부족해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나름 재밌게 잘 읽혔다. 간단하게 등장인물을 소개하자면,
ㅡ예수 (주인공)
ㅡ요셉 (예수의 아버지)
ㅡ성모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ㅡ빌라도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재판관)
ㅡ유다 (예수를 팔아넘긴 예수의 제자)
ㅡ마들렌 (성경에 의하면 예수 옆에 항상 붙어있던 여인인데 소설에서는 예수의 연인으로 묘사되고, 실제로도 연인 혹은 아내라는 주장이 있다.)
ㅡ베드로, 시몬, 베로니카 (예수를 도와준 사람들인가 아니면 친구인가 제자들인가 뭐 그런 것 같은데, 역시나 내가 이쪽으로 상식이 부족한 탓에 정확히는 모르겠다.)
ㅡ옥지기, 서른일곱 명의 예수 기적 수혜자 (다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일단 책에서 한 번이라도 언급되는 인물들은 다 정리해 봤다.)
예수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날, 예수가 행한 기적의 수혜자 서른일곱 명이 나타나서 예수의 기적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황당한 증언들을 해대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귀가 들었던 자는 마귀를 내보내줬더니 사는 게 시들해져 버렸다며 예수를 탓하고, 눈이 멀었던 자는 멀었던 눈을 뜨게 해 줬더니 세상이 이렇게 추악한 줄 몰랐다며 예수를 탓하고, 문둥병에 걸린 자는 문둥병을 낫게 해 줬더니 이제는 아무도 자신에게 적선을 하지 않는다며 예수를 탓한다. 심지어 아이의 병을 고쳐줬더니 병들었을 때는 얌전하던 아이가 이제는 너무 시끄러워져서 오히려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고 말하는 아이엄마도 역시나 예수를 탓한다. 그들은 예수를 가리켜 죄인이라 칭하고, 예수는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받는다.
하긴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아라 한다는 옛 속담도 있지.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이렇게 살아왔던 거다. 괜히 내 의견을 냈다가 결국 선택한 건 본인이면서 조금이라도 안 좋은 결과 나오면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 이렇게 됐다며 책임을 전가하고, 잃어버릴뻔한 물건 나서서 찾아줬더니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기분 나쁜 소리나 듣고, 시키지도 않은 선행을 베풀다가 되려 황당한 욕이나 처먹던 나의 지난 여러 경험들을 비춰봤을 때, 애초에 남 탓을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내 마음은 삭막해지고 남일에 웬만해서는 잘 안 나서게 되고 내 몸이나 사리고 그렇게 돼버린 것 같다.
근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예수를 죄인이라 부르고 탓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의 담담한 태도와, 진짜로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며 또 그런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고뇌하다가 이윽고 그것을 이뤄냈을 때, 예수에 대한 존경과 함께 나 자신에 대한 약간의 반성을 할 수 있었다. 나도 예수처럼 모든 걸 다 용서하고 살고 싶어졌다. 이제는 내게 상처 줬던 사람들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다 용서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반대로 내게서 상처받았던 사람들도 모두 용서했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위해서.
용서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각을 하지 말자. 생각을 하지 않으면 다 끝나는 단순한 문제였던 것이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예 그 사람을 망각하고 생각하지 않고 비워버리는 것이 답이었다. 이게 별거 아닌 뻔한 말 같은데 나한테는 진짜 큰 깨달음이다. 근데 문제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마음을 비우고 평온을 찾는 것, 그 자체가 엄청나게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된 수행이 필요한 거겠지. 이거 약간 불교사상 같기도 한데, 기독교나 불교나 결국 모든 종교의 핵심은 같은 게 아닌가 싶다. 한때는 기독교를 오해하기도 했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제대로 몰라서 그랬던 거였다.
머릿속의 공을 얻어야 한다. 소란이 지배하는 곳에 무를 창조해야 한다. 사람들이 거창하게 '생각' 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이명에 지나지 않는다. 109p
나는 신앙심이 전혀 없는 모태무교인이지만 한때 교회가 너무 궁금해서 잠깐 다녀봤었다. 헌금에 대한 부담감과, 내가 가고 싶을 때만 가는 게 아니라 매주마다 의무감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결국 흐지부지 짧게 끝났지만. 아무튼 짧게나마 교회를 다니던 그때, 성경 읽기 시간에 마태복음 27장을 읽었고, 목사님이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하시길래 거기에 대고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게 기억이 난다. 근데 이게 다 성경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러니까 아무것도 몰라서 할 수 있는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이십 대 중반 때의 일인데, 질문이 참 가볍다.
"예수가 하느님 아들이잖아요? 근데 예수는 원수도 사랑하고 막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일 텐데 왜 자기 아들은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내버려 뒀나요?"
"예수도 다른 인간들처럼 그냥 흙으로 빚어서 만들지, 굳이 왜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게 했나요?"
"다른 교회 가보면 교회 안 다니고 예수 안 믿으면 막 지옥 간다고 자꾸 그러는 곳도 있던데, 원수도 사랑하고 사람들 죄를 사하기 위해서 아들도 십자가 못 박혀 죽게 하시는 분이 고작 교회 좀 안 다니고 신앙심 좀 없다고 해서 멀쩡한 사람을 지옥불에 떨어뜨리나요?"
첫 번째 질문은 사람들이 흔히들 알고 있는 뻔한 대답, 즉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어쩌고 저쩌고 뭐 그런 대답을 들었고, 두 번째 질문의 대답은 기억이 안 난다. 뭔가 명쾌한 해답을 못 들었던 것 같아서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세 번째 질문은 나중에 생겨난 궁금증인데 질문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잘 안 했다. 어제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과거에 내가 가졌던 저 의문들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가도, 누가 그래서 질문의 답이 뭐냐고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하면 설명이 안 되는 걸 보니 여전히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종교에 대해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영화가 있는데, 바로 박해일 주연의 한국영화 '짐승의 끝' 이다. 영화 분위기가 칙칙하고 좀 뭐해서 여러 번 볼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담고 있는 메시지 하나는 마음에 든다. 남 말 참 잘 듣고 어리석게 당하기만 하던 주인공은 왜 정작 잘 들었어야 할 신의 말은 전혀 안 듣고 저리 사서 고생을 해야만 했을까. 영화는 이러한 주인공의 태도를 통해 꼭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지침을 분명히 전하고 있으나, 그걸 행할지 말지 자유의지를 함께 준다. 그래서 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세상에는 늘 악과 고통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라고 가정했을 때, 신은 인간을 굉장히 미워하거나 아니면 정말로 사랑하긴 하는데 다만 변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겨먹게 만들어놓고 결국 그렇게 했다고 벌을 주시니까.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꼭 합당한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건 아닌 것 같다. 세상에는 착하게 살다가 운 나쁘게 봉변당하는 사람도 많고, 꼭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 죄의 기준도 사실 굉장히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운명도 알고 보니 그저 심심한 신의 사다리 타기에 얻어걸린 것뿐이었고. 어쩌면 신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벌이라는 것도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고, 그저 우연히 일어난 결과가 벌처럼 느껴지는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애초의 신의 존재여부 또한 의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나는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감히 있다 없다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책에서 다른 부분보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이후 죽음을 앞둔 예수의 심정, 그의 고통과 갈증 등에 특히 몰입해서 읽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그의 모습에서는 경외심을 느꼈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감각들, 그것을 갈망할 때의 고통, 해소될 때의 쾌락 등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많은 에너지를 써가며 읽은 것 같다. 다 읽고 나니 조금 피곤했다.
배고픔을 더는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포만이라 부른다. 피로를 더는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휴식이라 부른다. 고통을 더는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위안이라 부른다. 갈증을 더는 느끼지 않을 때 그것을 칭하는 낱말은 없다. 언어는 지혜로워서 갈증에 반대되는 낱말을 창조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증을 해소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51P
너무 가난해서 '마시다'와 '먹다'가, 극도로 아껴서 쓰는 하나의 동사인 나라가 있을 거야 어쩌고 저쩌고. 그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너무 난해해서 내가 이해를 못 하겠어서 생략한다. 94P
프랑스에는 갈증의 반의어인 해갈이 없다고 한다. 나는 이 설명을 듣고 한국어에 해갈이라는 단어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나나 내 주변만 안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소에 전혀 쓰지 않던 단어라서 몰랐고, 평소에 갈증의 반대라고 하면 갈증해소 밖에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근데 찾아보니까 다 있었네. 그리고 마시고 먹는 게 하나인 동사라면 '삼키다' 가 있지 않나. 무언가를 입에 넣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는 행위, 즉 마시고 먹는 걸 모두 합한 단어. 어떤 특정 단어가 없는 것에 대해서 온갖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이지만 사실은 그게 지혜로워서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과거에 조상들이 언어를 만들다가 한두 가지씩 실수로 빼먹은 게 아닐까 싶다.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무식한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근데 작가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게, 한국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부모 잃은 사람을 고아라 부르고 남편 잃은 여자를 과부라 부르는 등, 가족을 잃은 사람을 칭하는 단어가 존재하는데, 자식을 잃은 부모를 뜻하는 단어는 없다.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단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해 보니 감히 단어가 존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존재하지 않지만 단어로는 존재하는 것. 대표적으로 영원이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영원은 정말로 단어로만,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말이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 됐든 한국어에는 갈증의 반의어가 존재한다네. 근데 또 따져보면 갈증이든 해갈이든 둘 다 한자어로 만들어진 단어고 순수우리말도 아니니 뭐.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식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잠시 목이 타는 갈증을 느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목마른 자가 물 잔을 입술에 갖다 대는 형용할 수 없는 순간, 그것이 바로 신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그것을 견뎌보라고 권한다. 마시는 순간을 늦춰보라고. 갈증을 해소하기 전에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철저하게 느껴보라. 실험을 해보라. 목이 타는 갈증을 참고 또 참고 또 참은 후에 잔의 물을 단숨에 들이켜지 마라. 한 모금만 입에 머금고 삼키기 전 몇 초 동안 참아보라. 그 경이로움을 가늠해 보라. 그 황홀함, 그것이 바로 신이다. 52P
이 단락에 의하면 신이란, 감각하는 육체를 가진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며 갈증이 해소되는 즉, 해갈의 순간에 찾아오는 황홀함을 의미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신은 다른 곳에 멀리 있지 않고 매 순간 우리와 함께 있으며 절정의 순간에 느낌으로써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신은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저 말들이 이런 식으로 이해가 되는데,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다. 나는 다른 운명을 상상한다. 당국자들이 이 홍수를 피해 달아난다. 사람들이 나를 풀어준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마들렌과 결혼한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영위한다. 나는 솜씨가 변찮아 목수일을 그만두고 양치기가 된다. 우리는 양의 젖을 짜 치즈를 만든다. 매일 저녁, 아이들이 그것을 먹고 식물처럼 무럭무럭 자란다. 우리는 행복하게 늙어간다. (중략) 비가 그친다. 달콤한 상상이 끝난다. 64P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기 하루 전 감옥바닥에 누워있을 때 밖에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가능성 없는 희망을 품다가 비가 그치자 다시 공포를 느끼다가 이내 단념하고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내가 도서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비가 오지 않았는데 이 글을 읽을 때쯤 창밖으로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고, 그 덕분에 엄청 몰입해서 이 글을 읽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숙연해졌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최후의 날을 상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제발 살아온 날들이 후회되지 않았으면, 더 살고 싶어서 절실해지지 않았으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언젠가 찾아올 최후의 날에 예수처럼 그냥 다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게 되려면, 끝이 좋으려면, 지금부터 진짜 정신 차리고 노력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잘 죽으려면 역설적이게도 건강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건강하게 살아가야겠다. 18페이지에 잘 죽으려면 건강이 필요하다는 대사가 나온다. 좋은 책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