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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인 Dec 06. 2023

서평: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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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호 디자이너의 두 번째 책.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디자인 필드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햇병아리를 강하게 매료시키는 제목이다. 디자인을 하면서, 정확히는 디자이너로 개인 스튜디오를 열기까지 권준호 디자이너의 글감들을 모아 엮은 에세이 북이다. 군데군데 말맛이 좋은 문장들이 독자의 마음을 녹이기도 하고, 디자이너들을 위한 뼈 있는 조언과 많은 경험적 직관들이 서려있기도 하다. 꼿꼿하면서도 뭉툭하게 툭툭 떨어지는 그의 여정들이 네모난 모양을 연상시켰다. 존재하는 사회에 어느 정도 몸을 끼워 맞추며 살아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 사이로 그는 당당히 네모난 굴림을 보여준다. 


말맛이 좋은 문장들


P.10.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서의 허기를 채워준’ , 경철이와 어진이에게 감사를 보낸다.

정서의 허기를 채워준다는 표현. 내가 런던 유학 3년 내내 찾아 헤맨 그것이다. 이 쉬운 말이 떠오르지 않고 내내 추상적인 갈증으로 남아있었던 걸 생각하면. 고국의 말로 사유하는 법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 병증을 더듬어 볼 수 있다. 20년 이상을 모국어인 한국어로 깊은 지적 탐구를 해왔던 나로서는 해외에서의 경험이 뇌를 건조하게 말려 부서지게 만드는 측면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Flat 한 언어, 단순화된 언어의 반복 사용은 일상에서 보다 복잡하고 깊은 사고를 방해한다. 꾸준한 노력이 수반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생업에 치여 살다 보면 모국어를 사용했을 때의 지적인 풍미를 잊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이 정서적 허기를 채울 수 있기를 늘 갈구해 왔다. 운이 좋게도 나의 정서적 허기를 채워준 이들이 런던의 일상에도 있다. 그 사람들을 떠올림과 동시에 답답한 마음이 후련해진다. 왜 생각이 안나는 말을 누군가 해주면 가려운 등 긁어주듯 시원한 마음이 들지 않던가. 


 P 176. 자세는 쉽게 흐트러지고, 눈빛이, 말투가, 미세한 몸짓이 달라진다. 그 급격한 자세의 이동은, 마치 꼬은 다리의 위치를 바꾸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어느새 무릎 위에 걸쳐서 까닥거리는 발목을 보는 일에 곤혹스러움과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때론 무의식적인 행위가 나의 분별력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 경험을 다리 꼬는 것에 비유하다니. 경각심을 일깨우자는 문장이 이렇게나 감각적이라니. 디자이너는 글도 잘 써야 하는 게 맞다.


디자이너의 통찰


P 38 각주. 김소연 시인은 산문집 [마음사전]에서 “동경은 존경과 유사한 상태지만, 존경이 이상적인 각주를 근거로 한다면 동경의 근거는 막연하고 미약하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이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하지 않는 반면, 동경은 쉽게 이동하며, 동경에는 존경보다는 좀 더 복잡한 욕망이, 흠모 보다는 좀 더 나른한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라고 정의한다. 시인의 섬세한 언어 덕분에 꿈이란 동경보다는 존경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나 그의 글은 유학생활을 한 디자이너에게 더 큰 공감을 이끄는 측면이 있다. 권준호 디자이너 역시도 런던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내 유학생활의 한을 떠올리게 한다. "WEST IS BEST" 여전히 한국의 카페거리와 감각적이라 여겨지는 많은 브랜드들, kpop 문화의 영역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문장이다. 나 역시 유학을 갈 당시, 한국 보다 더 좋은 교육이, 더 감각적인 디자인이 있을 거라는 환상과 동경을 안고 있었다. 그게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한동안 나는 런던의 환상에서만 살았다. 그러나, 코비드에 대처하지 못하는 영국의 방임식 교육 환경에 실망했다. 게다가 내가 내놓은 디자인에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라는 허망감이 매일 나를 찔렀다. 자신만의 문화유산을 끊임없이 재구조화시켜 현시대를 향유하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꼭 부모 없는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동경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착취의 역사 위에 올라간 문화를 재생산하고 재구조화하면서 그것이 존경이라 생각했다. 막연했던 나의 존경은 동경이었음을, 이제는 존경을 위한 이상적 각주들을 살필 때라는 것을, 이 문장이 정확히 짚어준다. 말은 때때로 그 깊이를 숨기고 있다. 


P 139.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클라이언트의 취향과 요구를 위한 작업이 그토록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이유는 - 이제와 돌이켜 보자면 - 그 작업의 모든 과정에 ‘나’라는 개인이 살아온 궤적과 경험이 반영된 조금의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작업에 '나'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1학년을 마치고 인턴일을 하면서, 나는 Contrl+c, Contrl+v의 현실을 조금 일찍 마주했다. 나의 미감과 개성이 전혀 개입할 틈이 없는, 단순 반복 작업 앞에서 커리어에 대한 고민과 비전이 뭉개졌달까. 이 문장을 앞 뒤로, 혹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나'를 나의 작업물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라는 단단한 그의 조언이 디자이너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모두 용기를 가지길, 반복된 틀 앞에서 애써 몸을 구겨 넣지 않기를. 


책 디자인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리스본 서점에서 진행하는 권준호 디자이너의 북토크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에게 심심찮은 감사를 전한다. 북토크에서만 들을 수 있는 표지 디자인 비하인드, 내부 디자인 과정들을 공유해볼까 한다. 


세모와 네모

기하학적 도형과 분주한 패턴으로 구성된 표지 디자인엔 일상의 실천 디자인 스튜디오의 디자인 라이프와 가치관이 담겨있다. 세모에는 '일상'을 네모에는 '실천'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권준호 디자이너. 일상의 실천 디자인 스튜디오는 권준호를 비롯해 김어진, 김경철 디자이너 3명이 모여 설립되었다. 그들이 찍은 프로필 사진에서 우연히 삼각형 구도가 만들어진 것에 착안해 세모라는 기하학 도형을 그려 넣게 되었다고. 복잡하게 구불거리는 선들은 3명의 디자이너가 꼬물꼬물 싸우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는 일상적 모습을 추상화했다.



실천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권준호 디자이너는, 실천의 운동성을 네모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천이란 논쟁과 담론 등의 복잡한 과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 혼란스러운 풍경을 패턴화 했고, 실천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는 파열음을 시각화했다. 네모라는 도형은 스크린을 주 무대로 하는 디자이너의 삶을 상징한다. 


"우리는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본다. 디자이너에겐 모니터일 테다. 그러니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실천의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권준호-


커버 디자인에 숨겨져 있는 차밍 포인트! 음각의 차이

북토크의 마력은 바로 자세히 보아야 알아차릴 수 있는 비밀을 턱턱 내준다는 것에 있다. 세모에 들어간 엠보싱은 여백에 입체감을 주어서 검은 잉크가 톡 튀어나와 있는 반면, 네모난 모양엔 검은 잉크 자체에 디보싱을 주어서 검은 잉크가 푹 들어가 있다. 이런 디테일이 그의 디자인적인 weird obssesion을 잘 보여준다. 


한 손에 들어오는 판형 사이즈와 최종호 서체

나는 북토크에서 저자에게 당신의 Wierd Obsseion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할 자리가 생기면 꾸준히 나왔던 단골 질문이었다. Wierd Obsseion이란, 보통의 타인은 절대 하지 않는 나만이 가진 이상한 집착적 행위를 말한다. 상공에 지나치는 비행기를 보고 항로와 브랜드, 목표지까지 다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한 때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사주를 봐주고 다녔다. 신실한 크리스천이라 선을 지키는 게 참 어려웠지만, 사주 자체가 보여주는 물상이 디자인적 영감을 주곤 했다. 사주는 사실 엄청난 인구를 통계화한 학문으로 자연에 빗대어 인간의 성향을 보여주는 학문이다. 나는 글자들에 서린 자연적 물상으로 선조들이 보았던 땅과 바다, 바람의 움직임을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에 매료되었다. 권준호 디자이너에게도 이런 Wierd Obsseion이 있을까? 그의 책 디자인 자체가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책들과는 다른 사이즈였으면, 그래서 눈에 띄였으면 했다는 저자는 책의 사이즈를 시집과 소설의 중간으로 맞췄다. 종이는 두꺼운데 가벼우며 미색으로 눈이 편안한 그린라이트 종이를 골랐다. 최종호체는 신명조보다 두껍고, 부리가 뾰족한데, 종이 위에서 잉크가 번지면서 부드러워지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기에 선택했다. 디자인의 무대가 디지털인지 물리적인 종이 위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특히, 호흡이 길지 않고, 모바일 화면에서도 읽히기 쉬울 정도로 조판을 구성했다. 디자인 실무의 디테일한 끝판왕을 이렇게 느껴보는 나로서는 아주 큰 공부가 된다.


목차 디자인

디자인에서 우연성의 역할을 잘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은 목차 디자인이 참 특이한데, 한글 자음 순서로 묶여있다. 작가가 글감을 모아두는 파일을 출판사에 보낼 때, 디지털 환경에서 자음 순서로 정리된 것에 출판사가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그것은 그대로 책의 목차 디자인이 되었다. 에세이의 분절된 에피소드 특성상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 큰 과업이기도 한데, 목차 순서가 개별로 존재하는 글감들에 흐름을 부여하고 있어서 좋았다. 



책을 추천하는 이유

대놓고 디자이너들아 보아라. 하고 쓰인 책을 비전문가 혹은 다른 영역의 종사자들이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가 작가님도 꽤나 궁금하다고 하셨다. 나는 그것이 그의 직업 정신에 있다고 본다. 대쪽 같은 그의 굳건함이 현시대를 살아가면서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변하지 않는 틀 앞에 좌절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무언의 응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글 중간 중간에 배치된 협업자들에게 보내는 권준호 디자이너의(일상의 실천의) 편지는 현실과 타협하기 어려운 지점을 손수 밝히며 자신만의 영역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도 된다. 조금 힘들더라도 그래도 된다는 말을 발견한 독자들의 눈에 차오르는 희망이 이 책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이 책은 산업 내에 존재하는 기이하고 고질적인 운동방식을 허물려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하면 필드에서 안 좋게 소문날 거 같고, 돈을 못 벌거 같지만, 그 누군가는 나의, 그리고 우리의 굳건한 행보를 조심히 지켜보고 있어요. 그 사람들과 작업하면 됩니다." -권준호


(      )의 일상의 실천

책을 다 읽고 나니 '디자이너의 일상의 실천'이라는 제목에서 디자이너라는 글자에 괄호를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의 일상의 실천을 부디 여러 분야의 사회인들이 맛보길 바란다. 한국이 점차 긍정적인 운동성을 지니며 변화하길 바란다.



https://everyday-practice.com/?_categories=everyday


P.S 알라딘 올해의 책에 후보를 올리다. 

알라딘에서 2023년 올해의 책 투표를 12월 7일까지 진행하고 있는데, 적립금 천 원까지 준다고 하니 달려가보자.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57058#voteT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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