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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인 Dec 18. 2023

영화평론: 헤어질 결심_1. 푸른 산과 바다


※ 주의! 영화의 결말과 관련한 스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보고 나서 보면 더 좋을 영화입니다. 어쩌면 영화와 영원히 헤어질 수 없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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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과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과 헤어질 결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평론가 이동진의 평이다. 이 문장을 보고, 이보다 더 정확히 이 영화를 설명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그만큼 볼 때마다 시점이 변화하는 영화고 해석의 여지와 숨겨진 상징물들의 기의가 더 깊어지는 영화다. 


 가장 한국적인 영화,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이 런던에 개봉했을 때, 영화를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상징물들과 미장센, 스토리의 울렁임이 한 데에 어울려, 비로소 한국이라는 말을 외치고 있었기 때문. 헤어질 결심의 영평 시리즈의 첫 시작이 될 이 글에서 헤어질 결심이 왜 한국적인 영화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의 색감, 푸른색

이 영화가 가장 한국적인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는 첫 지점은 색감이다. 영화 전반에 짙게 깔려있는 색채는 흑빛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이다. 푸른빛을 머금은 어두운 흑연. 그것은 바로 먹의 색이다. 한국의 회화는 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나무를 태워 얻은 그을음으로 만드는 송연 먹은 약간 푸른빛이 도는 게 특징이다. 미색의 한지 위에서 푸른빛은 노란빛과 섞여서 초록색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선조들은 먹의 농담만으로 암석과 나무 땅과, 산에서 바다로 흐르는 줄기들, 안개와 어스름까지도 이어서 표현해 냈다. 자연의 개별성을 단절시키지 않고 연결 지어 표현하는 것은 동양의 예술관이자 자연관이다. 서양화는 색이 뚜렷하게 구분된 물감, 즉 유화로 색을 섞어서 연결하는 반면 동양화는 한 가지 잉크에 물을 섞어 표현하는 회화 방식을 가지고 있다. 수묵화, 수묵담채화에서 보이는 회화적 특징은 색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색감을 인지하는 동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한때 한국에선 신호등의 빛을 파란색으로 불러야 맞는가 초록색으로 불러야 맞는가가 뜨거운 논쟁이었던 적이 있었다. 먹의 농담만으로 파란색이 초록색으로 이어지는 인지체계를 오랫동안 습득한 우리로서는 그 경계를 명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신호등의 빛은 초록불도 파란불도 아닌 그저 푸른빛이다. 


어둠에서 푸른빛으로 푸른빛이 파란색과 초록색 사이를 진동하며 다시 어둠으로 향하는 운동성은 헤어질 결심의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다.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엔 이런 색채감이 주 배경을 이루며 때때로 등장인물들의 감정 변화와 사건을 혼란시키는 내러티브의 요소로도 사용된다. 색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박찬욱 감독이라고 할 만큼, 그는 영화에서 색을 통한 상징을 변태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변태적이라 할 만큼 잘 설계해 넣었다.



영화 '올드보이'에도 짙게 깔려있는 푸른빛



헤어질 결심 속 푸른색의 의미_ 청록색의 역할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에선 초록색을 선명하게 사용해 고독, 죽음, 타락을 표현했다면 이번 헤어질 결심에서는 청록빛이 가진 모호성 그 자체에 주목한다. 특히, 경계의 모호성이란 성질을 지닌 청록색은 영화 내에서 죽음이자 구원을 상징하는데, 이는 영화를 흥미롭게 이끌어나가는 주 연료가 된다.


파란색인지 초록색인지 모를 청록색은 이포 주민들이 서래를 목격했다는 제보들에 혼란을 야기하고, 관객에게 서래의 살인에 대한 도덕적 딜레마를 던진다. 서래는 자신의 어머니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청록색을 띤 4개의 펜타닐을 먹이는데, 이것을 살인이라고 해야 할지, 안락사를 도운 서래의 구원이라고 해야 할지, 관객은 뚜렷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모호성이라는 단어는 곧 연결성을 의미한다. 청록색은 파란색이 초록색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박해준과 송서래를 강하게 엮어준다. 극 중에서 송서래와 박해준은 각각 산과 바다를 상징하는데,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한 인터뷰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송서래의 이름엔 산의 형상인 "ㅅ"이 들어가 있고, 박해준의 이름엔 대놓고 바다를 의미하는 海(바다 해) 글자를 넣었다고 한다. 해군 출신의 해준은 초밥을 즐기는 자칭 바다를 선호하는 인물이지만 비릿한 악취를 싫어한다. 반면 서래는 고소공포증이 있지만 자신만의 산을 찾으러 한국에 왔으며 어둑한 밤에도 산 깊은 곳을 거침없이 거니는 산형 인간이다. 이 부분에서도 각자가 온전하게 산과 바다로 대변될 수 없는 모호함을 지닌다. 유사한 듯 서로 다른 상대에게 끌리는 것이 바로 사랑의 기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둘의 연결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리라.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하게 산과 바다라는 상징적 구도에서도 한국의 민족적인 정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휴가를 산으로 가는 게 좋은지 바다로 가는 게 좋은지에 대해 우리가 격렬한 담론을 펼쳤던 걸 기억하는가? 우리는 MBTI가 한반도를 뒤덮기 전에 산과 바다로 끊임없이 서로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확인했다. 박해준은 송서래와 처음 대면 조사를 하면서 서래가 산형 인간인지 바다형 인간인지를 확인한다. 바다가 더 좋다는 서래의 말에 "나두요."라고 무의식 중에 읊조리는 해준의 모습은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대로부터 동질감을 찾으려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는가? 앞으로 걸어가면 산이요 뒤를 돌면 바다다. 영국에 살면서 도심 한가운데에 건물들 사이로 산이 보이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울에선 북한산, 인왕산, 수락산, 아차산을 포함한 26개의 산봉우리들이 건물들 사이로 매끈한 암벽을 보여준다. 현대엔 산이 많이 깎이고 아스팔트가 들어서 그 형태를 많이 잃었지만, 본래 한반도는 호랑이 무늬라 일컬을 만큼 산맥이 빼곡했다. 갖가지 산맥이 도심지 가까이로 깊게 파고 들어와 있는 땅이 바로 한반도인 것이다. 산은 바다로 바다는 다시 산으로 연결되어 존재한다. 산과 바다라는 가장 한국적인 모티프는 푸르다는 한국말로 연결되어 극을 이끌어 간다.




산과 바다의 형태감이 주는 미장센

색뿐만 아니라 형태감도 이 영화에선 빼놓을 수 없다. 산이 빼곡히 펼쳐진 서래네 집 벽의 무늬를 한번 살펴보자. 산의 삼각형 구도를 뒤집어 반복적으로 연결하면 대칭적 구도로 파도가 만들어진다. 산의 형상은 결국 큰 바다를 이루게 된다. 영화는 "이야기의 시각화"다. 산과 바다가 교차되는 이미지는 둘의 격정적 사랑을 시각화한다.  영화 속에서 둘은 물리적으로 끈적한 맞물림이 적었음에도, 산이 바다로 연결되는 묘한 맞물림이 둘의 사랑을 농도감 있게 유지시켜 준다. 이 영화가 그 어떤 것보다 성적인 코드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엔 박찬욱 감독의 탁월한 비유와 상징이 있다. 


성문화를 즐기는 동양적인 방식_은유와 상징

현대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hypersexuality culture는 글로벌화의 항로를 타고 전 세계적인 어조로 자리 잡았다. 이 말인즉슨, 대부분의 매체와 담론에서 성적인 코드를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외국 Flyer나 드라마에서 사람의 성기를 그대로 노출시켜 예술의 요소로 사용하는 것과 자신의 성적 경험담을 과감하게 공유하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한국에도 그 흐름이 타고 들어와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가 한 때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성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는 꽤나 낯설고 불편한 경험이다. 서양문화권에 살면서 성적인 경험을 나누어야만 쿨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현실에 불편함을 느낀 Yaska Sahara는 개방적인 성문화가 자신이 뿌리를 둔 문화에서 파생된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양권에서 성 문화는 자연물을 통한 비유와 은유로 향유되어 왔다. 조선시대에는 남성의 음낭 안에 가득 든 정자를 석류의 단면에 가득 박힌 씨앗들로 비유해 그려내길 즐겼다. 많은 자손을 낳으라는 의미로 석류가 그려진 민화를 선물하곤 했던 것이다. 개방된 성문화는 직접적으로 성기를 노출시키는 언행이나, 개인적인 성생활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조선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민화를 통해 은밀하고도 다양한 성 유머를 즐겼고, 성교육이 존재했으며, 야설을 즐겨 보는 등 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과하게 성적인 것에 몰두하는 태도를 경계하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이 미덕임을 가르쳐 왔을 뿐이다.  


이원복 교수의 석류도와 영화 속 석류 장면

어느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영화 속에서 서사를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 아니라면 성관계 장면을 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안정안과 박해준의 성관계 장면의 의미는 다음에 다뤄보도록 하자. 분명한 건, 이 장면에서 조차 인물들의 신체 중요부위가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답변은 영화 매체의 폭력성이 그간 끊임없이 대두되었던 논란거리들, 영화계에 만연한 성범죄와 영화의 폭력성이 관객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을 인지한 태도이자 신념임을 보여준다. 동시에 나는 이것이 한국적인 정서를 가진 감독으로서 박찬욱 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화적 어조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노컷뉴스에서 진행한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 내용 일부를 발췌한 부분이다.

Q. 이번 영화 '헤어질 결심'은 이전 작품들보다는 수위가 낮아졌다.

A: 최소화의 요소를 갖고 간결하게 구사해서 깊은 감흥을 끌어내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는 처음엔 모르겠더라. 이게 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고, 현대에는 이런 영화가 더 새로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은유적으로 성적인 코드를 향유하는 국민적 정서와 태도를 그는 기가 막히게 건드렸다. 함축의 미학은 통했다.



또 다른 상징의 사례로 '자라'를 들 수 있다. 자라는 정력에 도움을 주는 자연물로 한국에는 예전부터 자라를 탕으로 끓여 먹는 문화가 있었다. 남편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아내 안정안이 자라 진액을 언급하는 정도로만 영화 속에 등장했다면, 단순히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는 안정안의 캐릭터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라가 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자라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을 해결하려던 해준이 자라에게 물리는 시퀀스가 생각보다 길게 삽입된다. 그 이상의 분명한 의도가 서려있다. 자라는 뭍에 들어가 숨는 특성이 있으며, 자라에 한번 물리면 180kg에 육박하는 힘의 위력 때문에 평생 잊기 어려운 끔찍한 고통을 맞본다고 한다. 뭍으로 숨어 자결하는 서래가 해준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결말을 생각해 봤을 때, 자라는 서래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라는 결말에 대한 복선이면서, 서래와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섹슈얼한 상징물이다.



그렇다면 색감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자. 청록색에 극한의 대비감을 주고 있는 붉은색은 극에 어떤 서사를 더해주고 있는가. 빨간색은 피로 드러나는 폭력을 의미하며 석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격정적, 육체적 사랑을 은유한다. 엄마의 유골함을 감싼 천 역시 빨간색이라는 점에서 보편적 사랑의 의미로 확장된다. 공교롭게도 극 중의 사랑은 항상 피(죽음)로 연결된다. 송서래의 첫 남편 사망 사건이 서래와 해준을 만나게 해 주었고, 엄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서래는 엄마를 죽였고, 피를 싫어하는 해준을 위해 서래는 두 번째 남편의 사망 현장에서 피를 지웠다. 그리고 해준을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그녀는 자멸을 선택한다. 해준의 아내 안정안은 해준을 향해 “당신은 살인이랑 폭력이 있어야 행복하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조차, 인물들의 사랑의 끝엔 항상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준 씨같이 바람직한 남자는 나랑 결혼해주지 않아요. 얼굴 보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그녀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자조적인 발언처럼, 피는 사랑의 시작점이자 종점이 되길 반복하면서 극 중의 사랑들을 더 아릿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영화 속 붉은색은 어두운 피처럼 찐득하다. 



결말에 서래의 무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절규하는 해준 뒤로 해가 저물면서 강렬한 붉은색이 짙은 푸른빛을 밀어내는 걸 볼 수 있다. 서래의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해준의 사랑이 끝나고 서래의 사랑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서래가 온전한 미결로 남고, 이승에서 서래의 사랑이 끝났을 때 해준의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해준은 붉은 노을을 뒤로하고 신발끈을 고쳐 맨다. 서래를 찾으며 다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내달리려는 것이다. 그녀의 바람처럼 그는 앞으로 자나 깨나 서래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잠도 이루지 못한 채, 서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산에서 시작해 파도의 형상을 만들고, 대각선들이 끊임없이 상승하고 하강하며 양 극단의 지점을 찍어낼 것이다. 헤어질 결심은 결국엔 헤어지지 못하는 이들의, 구슬픈 사랑의 운동성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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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나왔을 때 의외로 종종 보인 댓글이 '결국 불륜 미화영화가 아닌가'하는 평이었다. 맞다. 불륜이라는 소재가 영화 속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불륜을 비롯해 살인, 사기, 비리, 전쟁과 약탈 등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모든 스펙트럼의 극적인 상황에서 인물의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내어 보여주는 것이 영화 매체임을 기억하자. 마음을 열면 헤어질 결심을 읽어낼 때 관객 앞에 아름다운 것이 더 많이 펼쳐질 것이라 장담한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이번 영화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사랑의 운동방식은 서로 끊임없이 교차하며 비껴가야만 완성된다. 끝없이 흐르는 바다처럼 계속해서 숨 쉬는 산처럼 삶과 죽음을 넘어서 이어진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 헤어지는 단편적이고 보편적 사랑의 형태로 이 아릿하게 비껴나가는 사랑의 영원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불륜뿐만 아니라 범법적 행위(형사로서 서래의 살인을 눈감아 주는 것)라는 외부적 요인들이 둘의 사랑을 끝없이 비껴가게 하고, 그 안에서 감독과 작가는 과연 사랑을 뭐라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표를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한국의 산과 바다, 두 자연물의 관계성을 모티프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것은 '헤어질 결심'이다. 이것은 한국이다.


+ 여담이지만, 다큐멘터리 감독을 하는 못된 영국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번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히치콕 영화라고. 백인들이 동양인 감독의 영화를 서양의 범주 아래에 위치시키는, 그래서 결국엔 한국영화라는 새로운 범주의 탄생을 막는 못된 습관은 여전히 구천을 떠 돈다. 그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 이 영화는 한국 감독이 만든 한국 영화야. 제대로 봐. 실제로 박찬욱 감독은 히치콕 영화를 보고 영화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감독이며 영화 내에서 히치콕 연출을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 감독이지만 이번 영화에서 만큼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의도하지도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헤어질 결심의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서 해보려 합니다. 다음 편도 기대해주시길 바라며 평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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