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커피로스터스 서교
[다시 가고 싶은 이유]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묘한 두근거림이 실려 있는. 뭔지 알 것 같아서 덩달아 나도 설레지만 애써 모른 척한다. 저벅저벅 다가와 내 앞에 서서 말을 걸 때까지, 그 사이의 작은 떨림을 중간에 끊는 건 예의가 아니다. 좋아요. 이번엔 뭔가요? 난 준비됐어요.
“저기.. 이번에 새로 만든 음료인데 일부러 한 잔 더 내려 봤어요. 드셔보세요.”
어머. 기쁨의 샤우팅을 누르며 점잖게 받아 든다. 뭘 이런 걸 다.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인사를 전한 뒤, 시선은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일을 마저 이어가려다 아차차 싶어 휴대폰을 집어 든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한 컷 남긴다. 오늘도 이렇게 일용할 한 잔을 받았다. 사실 한두 번이 아니다.
회사로 출근하지 않는 프리랜서 노동자에게 마음 편히 일할 카페는 귀하다. 집에서 집중력이 바닥을 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재택 작업을 아예 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해야 할 땐 한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일 때도 한다. 다만 특별한 이유 없이 낮 시간에 내 방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진득하니 업무를 이어가는 건, 하루 종일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취재하는 일보다 어렵다. 싸구려 의자도 불편하거니와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방임 상태에서 극대화되는 게으르고 산만한 천성도 문제다. 그래서 웬만하면 카페로 나간다. 멋들어진 작업실 같은 건 있을 리 만무한 내게 만만한 장소가 카페 말고 또 어디 있을까. 별다른 장비 없이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작업할 수 있는 나로서는 적당한 높이와 넓이의 테이블, 적당히 편안한 의자, 적당히 눈치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충전용 콘센트까지 겸비한 카페를 만나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히트커피로스터스 서교점(이하 히트커피)도 2년 전 여름에 처음 방문한 뒤로 도통 끊을 수 없는 ‘서교동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 같은 카페다. 매번 놀라운 맛을 선사하는 탁월한 커피와 활기 넘치는 바리스타들이 친절한 말투로 맞이해 주는 곳. 단골 작업실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꾸준히 다녔고, 열 번 중 아홉 번은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 작업에 매진하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커피 한 잔 시켜 놓고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일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면 당신은 혀를 끌끌 차게 될지도 모른다.
“하여간 카공족들이란.. 꼴랑 아메리카노 하나 사 먹으면서 지 사무실처럼 쓰고 있잖아 ”
“어우 어우 저 거북목 좀 봐, 모니터에 아주 들어가겠다 들어가겠어.”
틀린 말은 아니다. 아메리카노 쪽쪽 빨며 3시간 이상을 앉아 있을 때도 부지기수고 거북목은 검사만 안 받아봤지 바다로 나가도 이질감 없을 만큼 적잖이 튀어나왔다. 구석에 처박혀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는 동안 카페 안의 손님들이 여러 차례 물갈이된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카공족, 아니 나 같은 코피스(coffee+office)족도 사람인지라 사장님 눈치 손님 눈치 당연히 본다. 그래서 더더욱 예민한 잣대로 카페를 고른다.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해도 괜찮은, 작업실 삼기 좋은 카페인가.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몇 시간 동안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의 공간인가.
히트커피에 앉아 있으면 나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나 말고도 많다. 네 맘 다 안다는 듯 서로 적절히 떨어진 거리에서 노트북 화면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들의 뒤통수가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직원들도 나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서비스를 주면 줬지 눈치를 주는 일은 없다. 어느 날은 에스프레소를, 어느 날은 애플크럼블을, 또 어느 날엔 새로 개발한 신메뉴를 내 앞으로 스윽 들이밀 뿐이다.
한 번은 서비스 음료를 연달아 두 차례나 받는 바람에 내가 다 민망한 적도 있었다. 오후 1시쯤이었나, 카페에 들어와 브루잉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익숙하게 노트북을 펴고 충전기를 연결한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집중력이란 집중력은 다 끌어모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원고 작업에 매진하던 내 옆에 바리스타 B가 성큼 다가온다. “미숫가루라떼 드셔보세요. 일하시다 보면 달달한 게 땡길 것 같아서...”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 뻔했으나 잘 참았다. 매번 그렇듯 나의 진심이 최대한 전달되도록 미간을 팔자로 찡그리고 약간의 띨빵한 말투를 섞어 “어우..아유…아후우..” 같은 소리를 감사하다는 말 앞에 붙인다. 안 그래도 빈약한 집중력은 전성기를 한참 지나 빠르게 은퇴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는데, 때마침 등장한 시원달콤한 미숫가루라떼는 왕년의 스타를 여전히 굳게 지지하는 올드팬처럼 나를 독려한다. 그래, 정신 차리고 마지막까지 1시간 반만 더 달려보자.
그러나 한 번 하향곡선을 그린 집중력과 몰입력과 아이디어력 등등은 30분도 못 가 방전되고 마는데… 그 순간 바리스타 J가 나타난 것이다. 부드러운 훈남의 목소리를 가진 그의 손에는 에스프레소와 견과류를 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아포가토 좋아하시죠? 지금 딱 필요하실 것 같은데. (찡긋)” 고맙긴 한데 살짝 당황스러웠다. “좀 전에 다른 분이 미숫가루라떼 갖다주셨는데요?” 훈남 J의 동공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능숙한 바리스타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덧붙이며 홀연히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심심할 때 맛이라도 한 번 보세요. 다 안 드셔도 돼요.”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 앞엔 한 방울도 안 남긴 채 깨끗하게 비워진 3개의 커피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히트커피보다 작업하기 좋은 카페는 많다. 더 푹신한 의자와 더 밝은 조도와 더 고요한 분위기와 더 저렴한 커피를 갖춘 곳은 서울 시내를 조금만 돌아다녀 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물리적 환경만 생각하면 스타벅스나 투썸플레이스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를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히트커피처럼 ‘일하는 나’를 격려해 주는 카페는 흔하지 않다. 한발 늦은 바람에 좋아하는 자리를 놓친 내게 한참 뒤에 자리 났다며 알려주러 온 바리스타의 눈짓이, 자주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이것저것 챙겨주는 매니저의 쿨한 미소가 나에게는 전부 응원이다.
그 무언의 응원들을 힘에 업고 나는 여기서 첫 책의 원고 몇 편을 썼다. 톰 미쉬의 앨범을 들으며 지루한 인터뷰 답변을 정리했고, 느려터진 프리미어 프로를 붙잡고서 아무도 안 봐줄 것 같은 유튜브 영상을 편집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둘러싸여 작은 노트북만 맥없이 노려보던 나. 그런 내가 다시금 허리를 곧추세우고 손가락에 힘을 줘가며 스크롤을 내리고 타이핑을 할 수 있었던 건 쾌적한 공간과 한결같은 커피 맛만으로는 받을 수 없는 든든한 안정감 덕분이었다. 힘찬 인사와 조용히 건네는 시원한 에이드 한 잔,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상을 무리 없이 굴러가도록 도와주는 게 이런 작은 것들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소한 것일 테니. 히트커피 창가에 앉아 따뜻한 라테 한 잔 마시면 그만일 테다. 가뿐하게 살아도 된다.
그나저나 다음에는 또 뭘 챙겨 주시려나? 그땐 꼭 말해야 할 텐데.
“근데 사실 저 다이어트 중이에요…”
히트커피로스터스 서교
서울 마포구 동교로 146 관양빌딩 1층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