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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21. 2023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영감을 주는 커트

고호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영감을 주는 커트





또 새로 찾아야 한다. 1년 넘게 다닌 미용실은 이제 못 간다. 내 머리를 담당하던 J가 그만뒀기 때문이다. 잠시 쉬었다가 양양에 새로 숍을 열겠다고 하는데 바로 당장 열어도 머리 자르러 강원도까지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는 따뜻한 인사와 응원을 건넨 것도 잠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디 계실까요. 제 불쌍한 머리를 구원해줄 다음 선생님. 



수없이 많은 미용실을 다니며 공통적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고것 참 보기 드문 모발일세.” 보기 드물다는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다. (1) 이렇게 심하게 뻗친다고? (2) 이렇게 빨리 자란다고? (3) 이렇게 빽빽하다고? 혹시라도 (2)-(3)을 보고 ‘지금 자랑하는 거냐’라며 분노하는 전국탈모인협회 회원분들께서는 노여움 푸셔도 된다. 나도 시간문제다. 할아버지 탈모에 아버지도 탈모입니다. (1)과 (2)의 환상적인 티키타카는 내 돈과 시간을 적지 않게 뺏어가는 주범이다. 중력을 거스르며 삐져나오는 머리는 그냥 말리고 빗질하는 정도로는 말을 듣지 않는다. 윗머리는 최대한 숱을 가볍게 치고 옆과 뒤는 최대한 바짝 밀어버리지만, 그마저도 드라이기-포마드-스프레이 3단 콤보로 조져놔야 겨우 자리를 잡는 수준이다. 문제는 이 상태가 한두 달씩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 열흘이 넘어가면 ‘오, 좀 길었네’ 생각할 정도로 들쭉날쭉해지고, 보름이 지나면 좀처럼 신뢰가 가지 않는 인상으로 바뀐다. 이 혈기왕성한 친구 덕분에 내 통장은 길어도 3주에 한 번씩 금 같은 커트 비용을 토해내는 중이다. 



미용실을 고를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다. 이토록 까다로운 모발조차 능숙하게 다룰 실력은 기본이고, 싫은 소리를 잘 못 하는 찌질이 고객도 부담없이 요구하고 요청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를 지닌 선생님을 원한다. 매장 위치가 집에서 너무 멀지 않아야 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선택지는 대폭 줄어들 수밖에. 나는 얼른 결정해야 했다. 머리는 점점 길어지고 하루빨리 이 더벅머리를 탈피해야 하는 상황. 그때 문득 광화문의 한 바버숍을 떠올리게 된다. 일전에 지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보고 눈여겨봤던 ‘고호'라는 이름의 매장이었다. 네이버 예약 리뷰를 정독하고 공식 계정을 훑어 본뒤 내친 김에 태그된 게시물까지 찾아봤다. 바버샵 하면 떠오르는 투박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세련된 카페에서 볼 법한 밝고 단정한 이미지의 실내 사진이 눈에 띄었다. 홍대나 이태원, 성수동이 아닌 광화문에 둥지를 틀었다는 점도 신선했다. 조금씩 올라가던 호감에 쐐기를 박은 건 이용자 후기. ‘참 정성스럽게 머리를 만져준다'라는 내용이 일관되게 등장했다. 퀄리티보다 태도와 싸가지에 더 민감한 나라에서 이 정도 반응이면 나쁘지 않군.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이 좋은 예감을 나는 속는 셈 치고 믿어보기로 했다.  





고호의 C 원장님은 정중하고 깍듯했다. 컵에 가득 따라 건넨 시원한 물 한 잔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초장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은은하게 풍기던 디퓨저 향과 미니멀한 인테리어 역시 세련되면서도 과하지 않아 긍정적인 첫인상을 남기는 데 일조했다. 머리를 감고 자리에 앉았다. 가운을 두르기 전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목에 얇은 거즈 비스무리한 걸 감아줬는데, 이 사소하고도 생경한 요소에 나는 내가 잘못 찾아온 게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평소 내가 미용실에 머무는 시간은 30분 남짓. 기본 1시간 예약이지만 별도의 서비스를 받지 않는 이상 머리를 감고 드라이하는 것까지 다 해도 아무리 오래 걸려야 45분을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고호만 가면 매번 1시간을 꽉 채워 나온다. 중간에 딴짓을 하거나 수다를 떠느라 지체된 것도 아니다. 여태 이렇게 세심하게 커트 작업을 한 미용사를 만난 적이 있었나? 꼬꼬마 시절부터 나를 스쳐간 다른 수많은 미용사들이 죄다 건성으로 했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C는 아주 천천히, 정성을 다해 머리를 손질한다. 3mm 탭을 장착한 바리깡으로 시원하게 뒷머리를 밀 때도, 다 자르고 나서 눈썹 정리를 해줄 때도, 심지어 처음에 윗머리를 고정하는 집게를 끼울 때조차 머리칼을 몇 번이고 헤집는 거 아닌가. 거듭 반복하다 드디어 정확한 지점을 찾았다는 듯 검지와 중지에 힘을 줄 때 ‘여기다!’ 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물론 결과물의 만족도 역시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례한다. 아주 짧게 올린 옆머리에서 뒷머리로 이어지는 둥근 라인의 정교함이나 잔털 하나 없이 칼각으로 정리한 이마 옆 라인을 가까이에서 보면 얼마나 꼼꼼하게 맞춰 잘랐는지가 다 보인다. 안경 벗고 확인했을 땐 그럴듯해 보였는데 집에 와서 제대로 보니 삐뚤빼뚤 아주 난리 부르스를 만들어 놨던 회기동의 B 미용실을 똑똑히 기억한다. 



순수하게 커트 시간만 40분 가까이 들다 보니 중간에 졸음이 쏟아질 때도 부지기수다. 사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그대로 잠들었다가는 눈을 떴을 때 거울 속에서 어떤 재밌는 머리를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용사에게 알아서 다듬어달라 말하고 온전히 맡겨버리면 대참사가 일어나도 할말이 없다. 그때 가서 왜 이 지경이 되었냐며 원망해봐야 이미 늦지.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 차리고 깐깐한 감시와 피드백을 이어가야 한다. 시술 전 커뮤니케이션이 조금 어긋나더라도 실시간으로 상황을 지켜보며 적절히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다면 최악의 결과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작 나는 C의 손길 앞에서 힘 한 번 못 쓰고 무너져 내린다. 이번엔 절대 안 졸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바리깡의 익숙한 온도와 소리가 닿으면 스르르 눈이 감기고 천천히 고개가 떨어진다. 이미 몸이 알고 있는 거다. 걱정 없이 맛있게 자고 일어나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봤던 지난날보다 훨씬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 거란 사실을.  말없이 노려 보든, 시시콜콜한 잡담을 귀찮을 정도로 지속하든, 널 믿는다며 윙크 한 번 날려주고 배짱 있게 취침에 들어가든 그는 늘 똑같이 머리를 자른다. 알아서 정성껏,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음에는 어떻게든 잠을 쫓아내볼 생각이다. C의 퍼포먼스를 꼼꼼히 지켜봐야 하니까. 커트하기 전 머리에 핀을 꽂는 것부터 샴푸 후에 물기 하나 남지 않도록 드라이해주는 것까지, 숯 가위로 정수리 부분을 정리하는 것부터 깔끔해진 뒤통수에 애프터쉐이브를 발라주는 것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그의 자세를 배우고 싶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중 하나는 툭 하면 요령 피우려 하는 것이다. 최대한 힘 들이지 않으면서 많은 걸 얻고 싶어하는 욕심쟁이의 면모가 적지 않다. 주어진 순간에 몰입해 최선을 이끌어내기보다, 과거의 내가 해놓은 것들을 빌어 최소한의 에너지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자타공인 ‘꿀빨러’. 그런 내가 꼭 목격하고 본받아야 할 모습이 이 작은 바버샵에 있다. 나를 찾아준 고객 앞에 성심을 다하는, 자기 일에 거짓말하지 않고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는 직업인의 정직한 태도가. 가까이에서, 여러 번 반복해 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테다. 분야가 달라도 상관없다. 배울 점은 어디에나 있다. C가 고도로 집중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구경만 해도 분명 뭔가 느껴질 것이다. 지켜 보고, 대화 나누고, 따라해 봐야지. 관찰이 흉내가 되고 흉내가 습관이 되도록. 영감은 멀리 있지 않다.



머리도 자르고 영감도 얻을겸 매달 나는 광화문으로 향한다. 7025번 버스를 타고 사직단 정류장에 내려 경희궁1길로 들어선다. 한적한 오전의 골목 분위기를 만끽하며 걷다 보면 성곡미술관과 커피스트를 지나치고, 머지 않아 매장의 창 너머로 오픈 준비에 분주한 C가 보인다. 언제나처럼 깨끗한 계단과 입구에 성큼 발을 내딛으며 인사한다. 선생님, 오늘도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참고로 고호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마음을 써서 돌보아 주다'. 요즘 말로 ‘닉값’ 한 번 제대로 하는 이름이다. 




고호

서울 종로구 경희궁1길 32 신문로 하우스 1층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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