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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21. 2023

[다시 가고 싶은 이유]
같이 놀자, 우리 집에서

더 차일드후드 홈


[다시 가고 싶은 이유]

같이 놀자, 우리 집에서





나는 포저(poser)인가? 



성가신 파리 한 마리가 윙윙 거리듯 얼마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던 질문이다. 포저는 포즈를 취하는 사람, 정확히는 포즈만 취하는 사람, 그러니까 ‘~척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주로 서브컬처와 패션 분야의 커뮤니티에서 조롱의 의미로 쓰인다. 가장 대표적인 영역이 스케이트 신이다. 스케이트보드를 잘 타지도 못 하면서 슈프림과 트래셔 같은 스케이트보드 문화 기반의 브랜드 의류를 과시하듯 착용하는 사람들 있지 않은가. 시작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으면서 이 바닥 고인물처럼 보이고 싶어 깨끗한 보드 데크에 일부러 스크래치를 낸다거나, 공원에 나와 인스타그램 업로드용 사진만 찍어대며 몇 번 발을 구르고는 곧바로 술 한 잔 하러 가는 이들. 그저 보드 타는 게 재밌다는 이유로 점프하고 다치고 땀 흘리고 욕 먹는 일상을 사는 ’진짜’ 스케이터들에게 이런 포저의 존재는 문화를 망치는 애송이들일 뿐이다. 



문화를 망치는 애송이, 줄여서 ‘문망송이’의 범주에 나 역시 포함되는 걸까? 나를 힙과 쿨이 흐르는 서브컬처 혹은 스트리트 신의 내부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므로 일견 맞는 것 같다. 무리 지어 스케이트보드를 타러 다닌 것도 아니고 래퍼 ・ DJ ・ 패션 디자이너 ・ 그래픽 디자이너 ・ 비디오그래퍼 등의 친구들과 크루를 결성해 파티를 열고 콘텐츠를 만들어내지도 않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사람을 문화를 망치고 훼손하는 정도의 몰지각한 수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가. 내가 뭘 얼마나 재수 없게 굴었다고. 양쪽 다 일리가 있다. 칼로 무 자르듯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다만 명백한 것은 힙과 쿨을 몇 방울이라도 핥아보고자 긴 시간 문화의 언저리를 처량하게 배회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적어도 나는 문화에 끼고 싶은 애송이, 줄여서 ‘문끼송이'였던 것이다.



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하다 못해 옆 학교에서 전학생이 와도 기존의 학급 질서는 좀처럼 깨지지 않고 공고히 유지되지 않던가.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난 인디 문화, 약간의 반항정신과 위풍당당한 기세를 장착한 채 철저히 취향을 중심으로 결속하는 집단에 새로 진입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물건 파는 가게에 들어가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나는 손님의 신분이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손님을 기다리는 법인데 이상하게도 홍대 A 편집숍은 한 번을 못 들어갔던 것이다. 입구 쪽에 서서 담배를 맛있게 태우던 형님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는 여기 초대받지 못 했단다, 친구야." 



물론 입장을 거부하는 직원은 없었다.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는 직원의 지인도 없었다. 그러나 한껏 위축된 나는 티셔츠나 모자가 궁금했을 뿐인 B 매장마저 스케이트보드 없이는 들어가면 안될 것 같다는 성급한 자체검열로 인해 한 발짝도 들이지 못 했다. 흑인음악을 기가 막히게 튼다는 모 레코드 바에서는 방문을 고대하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30분만에 맥주 잔을 비우고 나온 적도 있다. 무엇이 나를 그리 불편하게 했는지 모른다. 손님이 들어와도 본체 만체 하며 일행과 희희덕거리는 사장의 웃음 때문에? 입고 온 옷의 브랜드가 뭔지 확인하려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던 눈빛이 불편해서? 지금 돌이켜 보면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잘못 없다. 그냥 내가 좁밥이라서 쓸데없이 쫄았을 것이다. 김좁밥 군은 생각했다. 이곳은 나 같은 초심자를 환영하는 곳이 아니다. 운영자와 업계 종사자와 친구와 지인이 어우러지는 그들만의 리그를 더 굳건하게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신용산에 서브컬처 기반의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시큰둥했던 이유다. 사실 시큰둥은 거짓말이고 긴가민가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새로운 공간을 알게 되면 기어이 한 번은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호기심 강한 성향과 ‘어차피 가봤자 늘 그랬던 것처럼 불편할 거’라는 의구심이 공존했다. ‘더 차일드후드 홈’이라는 예상보다 귀여운 이름이 맘에 들었던 나는 또 한 번 속는 셈 치고 가보기로 결정한다. 큰 기대는 내려 놓고서.



용산우체국을 지나 매장 입구에 도착했을 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쭈그려 앉아 줄담배를 태우는 덩치 큰 형님들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가자 덩치 형님 대신 풍성한 곱슬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낀 남자가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다 말고 인사를 건넨다. “어서오세요.” 부드럽고 나긋했다. 낯설었다. 이 형님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지 않고 있어! 비로소 긴장이 풀렸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본격적으로 구경 모드에 돌입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모자와 티셔츠. 굵직한 영문 슬로건과 경쾌한 일러스트가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전부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의 제품이다. 공간의 중앙부를 넓게 차지한 원형 테이블 위에는 패션 아이템 외에 자유분방한 매력이 넘치는 인디펜던트 진(zine)이나 아기자기한 리빙 소품도 보였다. 특히 몇몇은 내가 아는 서브컬처나 스트리트 패션과는 하등 상관 없는 편집숍에서도 종종 보였던 물건이다. ‘여기는 이런 것도 파는 구나’ 속으로 신기해 하며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인양 앞뒤 좌우로 열심히 돌려봤다. 창가 진열대에 놓인 선글라스도 괜히 한 번 들었다 놓고, 개성 강한 오브제를 앞에 두고는 살 생각도 없으면서 눈알을 굴리며 고민하는 듯한 제스처도 취해본다. 



그렇게 혼자 생쇼를 하는 동안 사장님은 나를 한 번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추천해준답시고 이건 어때요 저건 어때요 나불거리지도, 내 손길이 닿은 물건들의 배열을 보란 듯이 매만지며 지나치게 큰 헛기침을 내뱉지도 않았다. 다른 손님이 와도 마찬가지다. 들어왔을 때 봤던 모습 그대로, 가벼운 인사 뒤에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자기 일만 한다. 그 적당한 무관심. 손님을 무시하는 것도, 그렇다고 감시하는 것도 아닌 절묘한 스탠스가 나는 좋았다. 뒤로 한 발짝 빠져준 그와 나 사이에 쾌적하고 편안한 공기가 흐른다. 빈손으로 돌아가도 괜찮으니 조금만 더 머물고 싶다고 느꼈다. 



이후로 가끔씩 사장 D와 교류할 일이 생겼다. 내가 에디터로 참여한 매거진을 더 차일드후드 홈에서 판매한다든지, 용산구의 감각적인 쇼핑 플레이스를 소개하는 콘텐츠를 위해 취재 차 방문한다든지 하는 것들. 대체로 내가 먼저 구상하고 제안하며 도움을 구하는 쪽이었는데 그때마다 D는 첫인상에 어긋나지 않는 젠틀한 모습을 보이며 기꺼이 요청에 응해줬다. 으스대며 건방을 떨거나 무리한 요구를 던지는 법은 없었고 우리의 짧은 대화는 언제나 웃음 섞인 인사말로 끝을 맺었다.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이라고, 이따금 찾아간 매장은 주인을 닮아 한결같이 밝고 아늑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비주류 감성이 물씬 풍기는 독특한 아이템과 브랜드나 아티스트에 크게 관심 없어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무난한 디자인의 소품은 늘 적절한 균형을 이뤘다. 덕분에 스트리트 패션에 빠삭한 자칭타칭 매니아 ・ 나처럼 주워 들은 건 많은데 제대로 경험해본 건 없는 서브컬처 포저 ・ 근처에 카페투어를 왔다가 시간이 떠서 잠시 들른 커플 ・ 브랜드를 운영하거나 디자인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한데 섞인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누구 하나 초대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친구 분과 함께 오셨는데, 들어 보니 먼저 다녀간 아들이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D가 건넨 이야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엄마에게 적극 추천할 수 있는 편집숍이라니. 틈만 나면 돌아다니며 공간 데이터를 모으는 나도 여기 꼭 가보라며 엄마에게 이런 가게를 소개해 주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다. 서브컬처를 베이스로 젊은 감각을 뽐내는 매장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더 차일드후드 홈이라서 이해가 간다. D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모아 놓은 안락한 집에 놀러온 기분을 주는 공간이니까. 흥미가 있다면 누구든지 부담없이 들어와 여러 로컬 브랜드와 크리에이터를 천천히 알아갈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을 한껏 낮춘 가게. 신용산으로 향할 때 때마다 나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문화의 깊이는 애호가와 추종자들이 만든다. 외연의 확장만 신경 쓰다 보면 코어층을 이루던 구성원들은 금방 싫증 내며 떠날 테고, 어중이떠중이들이 흐려 놓은 웅덩이는 원래 색깔을 기억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다만 고립되는 건 다른 문제다. 아는 사람만 아는 문화는, 늘 우리끼리 즐기는 문화는, 알고 싶어서 주변부를 배회하는 나같은 잠재적 애호가들을 배척하기 쉽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이 커뮤니티의 깊이와 밀도를 책임지는 진짜배기로 성장할지도 모르는데. 그 희미한 가능성을 더 차일드후드 홈은 안다.



얼마 전 슈프림이 국내에 상륙했다. 오픈 몇 주 전부터 슬슬 소식이 돌더니 도산공원 인근에 매장을 열었다. 참고로 슈프림은 매장 직원들의 싸가지(?)로 악명 높은 브랜드다. 간지에 비례하는 무례함으로 무장한 형, 누나들이 기싸움을 벌인다는 전설적인 썰들을 온라인 상에서 여러 차례 접했다. 과연 동방예의지국에서도 그 기조는 유지될 것인가? 적어도 나는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할 것 같다.  





더 차일드후드 홈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40길 5 (세븐일레븐)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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