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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Jul 22. 2017

그렇게 악마가 된다

영화 <곡성>을 보고







1.


  이 영화에 관해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 나는 이 영화에 관한 단 하나의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다는 것. 무엇이 맞는 걸까. 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머리와 마음에 들러붙는 감정들은 하나의 덩어리로 모아지지 않고 수많은 파편들로 흩어져 있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자연스레 따라가게 되던 이야기의 궤적은 각 인물들의 깊은 내면이 드러나는 지점에 이르자 별안간 복잡한 미로처럼 바뀌어버린다. 인물의 정체를 내밀히 파악하기 힘들어 한번 미로에서 길을 잃게 되니, 다음 길 안내의 힌트가 되어줄 중심 사건의 인과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혼돈, 그리고 혼동. 영화 <곡성>의 내피와 외피를 모두 관통하는 키워드. 우리는 영화를 보며 '도대체 누가 귀신이고 악마인가?’ 라는 하나의 물음을 떨쳐내지 못한다. 답을 찾기 위해 인물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 장면 속 소품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분석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과정일 뿐.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이리저리 대입해 봐도 꼭 몇 가지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남는다. 왜 나홍진 감독은 그 답을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 걸까? 무얼 말하고 싶은 거지? 혼돈의 원인을 찾아가기 위해 질문에 질문을 연결 짓다 보니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혼돈을 주는 것. 헷갈리게 하는 것. 그것이 나홍진의 진짜 의중이고 우리에게 던져주는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다.”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고 헷갈리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사건과 인물을 둘러싼 사실관계의 면면을 따지는 게 아닐 테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하나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을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점차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풍경 말이다. 이제는 명쾌한 하나의 답을 말해볼 수 있겠다. <곡성>은 믿음과 의심, 그로 인해 드러나는 인간 존재의 발가벗은 모습을 우리 앞에 들이미는 영화다.






2.


  가장 강력한 두려움은 무지(無知)에서 온다. 이해하고 분석하고 계산할 수 없는 현상이 눈앞으로 닥쳐올 때 인간은 극한의 공포를 느낀다. 정보와 지식은 홍수처럼 범람하지만, 기존의 정보와 지식 너머로 덮쳐오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알 수 없음, 앞에서 인간은 이다지도 초라하고 무력하다.


  여기 한 마을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는데 그 과정이 기괴하고 심상치가 않아서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이성과 합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치 초자연적인 일인 것만 같은 일들의 연속. 정체 모를 사건들이 점점 늘어가자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아무도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그러던 와중 어느 순간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꿈 얘기, 주변 이웃에게서 들은 얘기 따위가 여기저기 전해진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편견’이라는 탈을 두른 채 점차 모이고 합쳐져서 어느새 ‘소문’은 ‘사실’이 되어간다. 소문에 현혹되고, 이를 토대로 의심하고, 의심이 확신과 단정을 거쳐 깊은 믿음으로 변해버리는, 놀라운 과정. 채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그렇게 누군가는 범인이 되고 악마가 된다.




  그럼 다시, 우리가 떨쳐내지 못했던 물음으로. 도대체 누가 악마란 말인가? 곡성 마을에 돌았던 소문처럼 일본인(쿠니무라 준)이 악마일까? 많은 해석들이 있겠지만 나는 일본인이 악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본래 스스로 그러한’ 악마는 아닐 거라고. 그러나 종구(곽도원)는 그를 악마라고 확신했다. 시답잖은 이야기들에 슬슬 현혹되더니 그 재앙이 자신의 일이 되자 판단력이 흐려져 앞으로만 돌진했다. 딸 효진(김환희)이 아팠고, 아픔의 원흉이 일본인 악마 놈이라 믿게 되니, 그 믿음 하나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이다.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까지 하면서. 그렇게 일본인은 악마가 되었다. 딸아이를 위한 종구의 믿음과 의심은 딸과 그를 구원하는 대신, 무고한 한 명의 인간을 악마로 몰아갔다. 종구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악마로 규정된 일본인. 이 과정에서 일본인의 존재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그는 정말로 누구인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 악마였을 뿐.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은 마을을 산산조각 내려는 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뿐. 어디에도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악마인가, 를 논할 때 종구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동료형사 성복(손강국)이나 그의 조카인 부제 이삼(김도윤)도 마찬가지. 초점은 일본인과 무명(천우희), 일광(황정민)에게만 맞춰진다. 부성애 혹은 여타 다른 명분 덕분일 것이다. 그럼 그들은 누구인가. 일본인을 악마로 몰아가고 죽이려고 까지 했던 그들을, 우리는 악하지 않은 존재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악마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 스스로 그러한’ 악마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에 의해, 세계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게 악마고 귀신이 아닐까? 그렇다면 진짜 악마는 초월적이며 영적인 ‘특별한’ 무언가가 아닌,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닐까? 누군가를 악마로 몰아세우고 악마를 만드는 인간들. 악마를 만들며 저조차도 결국 악마가 되어가는 인간들. 전부 발가벗겨진 인간 존재란 이토록 나약하고 추악하다.


  믿음과 의심은 위태롭다. 믿음은 믿을만한 것이 못되고, 의심은 의심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때로는 그 자체로 ‘현혹’일 수 있으니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결국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의심하고 싶은 것만 의심하게 될 때, 인간은 괴물이 된다. 믿는다는 건 믿지 않는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영역 안에 선택받지 못한 것은 철저하게 배제당한 채 의심의 대상으로 낙인찍혀 낙오된다. 그 낙오된 자리로 존재는 규정된다. 배제와 낙인의 폭력. 믿음과 의심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쓴 괴물. 정작 자신은 모른다.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무언가를 믿고, 또 믿지 않으며 뜨겁게 나아갈 뿐. 끝에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곡성>을 통해 나홍진은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믿겠습니까. 또, 무엇을 믿지 않겠습니까. 종구를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이 당면했던 거대한 질문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다가온다. 직접 대답할 차례다. 피하려 해도 끝끝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대답의 연속이야말로 우리의 삶 자체일 거니까. 믿음과 의심의 기로에 설 때마다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보지 않으며, 선택과 배제, 그리고 믿음과 의심의 터널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인간이란 이토록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이기에. 다만 바라고 바랄 뿐이다. 절대 현혹되지 않기를. 그리하여 악마가 되어가지 않기를 말이다.




                                                                                                                   <곡성>, 나홍진


                                                                                                                        2016.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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