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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Jul 22. 2017

자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할 때

영화 <데몰리션>을 보고







아내가 죽는다. 찰나의 사고로 혼자가 된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 이전처럼 출근한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다. 시간이 흐른다. 문득 냉장고를 발견한다. 죽기 전 아내의 마지막 말이 스친다. 자꾸 무시하지 말고 냉장고 물 새는 것 좀 고쳐줘. 들여다보니 상태가 말이 아니다. 하나씩 뜯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어딘가 그는 변해간다. 궁금하다. 장인어른 댁에 있는 괘종시계는 어떻게 작동할까. 사무실 컴퓨터 본체는 어떤 구조로 생긴 거지. 참지 못하고 뜯어본다. 모조리 분해한다.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게 생각한다.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때때로 아내의 기억들이 침투해서 시간을 거슬러 본다. 무심했던 자기의 표정과 태도가 밉다. 그녀에게 오롯이 집중했던 순간은 과연 있긴 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아득한 장님처럼 살았던 것인가. 아내는 여태 눈먼 사람을 바라보고 노래하고 껴안았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과 그 관계를 분해하고 해체할수록 틈이 벌어진다. 사이로 밀려드는 건 작은 회한과 커다란 무력이다. 



회복하는 중이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려 하기 때문에. 지나간 것이 실은 지나쳤던 것임을 인지하면서 잃어버린 순간들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때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더라도, 다만 지금 여기를 보게 된다. 하여 새로워진다. 온통 새로움으로 가득차고 상실의 자리는 점차 발견으로 메워진다. 



끝내 그는 집을 부순다. 아내와 함께했던 공간을 파괴한다. 공간에 깃든 시간을 해체한다. 망치로, 전기톱으로, 불도저로, 구석구석. 집은 곧 허물어진다. 분해하고 파괴하고 해체하는 과정 속에서 불쑥 충격적인 진실이 튀어나온다. 그는 멈추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돌아보지 못한다. 다가올 무수한 삶의 조각들이 새로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해방. 죽음과 상실의 늪에 천천히 잠식되어가던 그는 도리어 자유를 본다. 아내의 죽음은 그를 침체시킬 것 같았으나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죽음 이후로 삶이 온다. 그는 파괴되지 않고 회복한다. 끝에서 시작을 맞는다.  




                                                                                                     <데몰리션>, 장 마크 발레


                                                                                                                       2016.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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