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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Apr 12. 2017

숨을 내뱉는 시간







억울했다. 그거다. 이 짧은 겨울여행의 이유. 방학이 끝나간다. 두려웠고 억울했다. 나는 무얼 했나. 무얼 했고 무얼 하지 않은 방학이었지? 지나간 시간을 떠올려보니 애써 눈에 힘을 주며 중앙선과 분당선을 갈아타는 내가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지독히도 추운 날들. 지하철에서 들여다본 휴대폰 화면 속의 친구들은 추워도 춥지 않은 듯 웃고 있었다. 그들은 유럽에서 동남아에서 일본에서 행복했다. 나는 여기에서 행복했지만 자꾸만 가슴팍 언저리가 저렸다.

 

조금 지쳤다. 군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한 아르바이트로 보낸 겨울방학이 끝나면 새 학기가 시작될 터였다. 제대 후 복학만으로도 부담인데 방학 내내 일만 하고 곧바로 학교에 가려니 더 막막했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살인 줄 알면서도 엄살을 부렸고 가끔은 그런 내가 미웠다. 내 잘못이 아닌 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일이란 아프다.

 

숨을 돌리고 싶었다. 나는 지금 틈에 서있다. 바쁘게 걸어왔고 이내 또 바쁘게 걸어가야 할 길. 그 가운데, 잠깐의 틈에 멈추어 있는 나는 다시 출발하기 전에 크게 한번 내뱉을 수 있는 숨이 필요했다. 짧은 숨 같은 여행을 위해 나는 A가 있는 부안으로 갔다.

A는 부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펜션을 운영한다. 넓은 서해바다를 껴안은 변산반도의 까치댕이 포구 위 조용한 목조주택. 거의 매 계절마다 찾다 보니 이제는 익숙함과 편안함이 먼저 반기는 이 곳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짧은 숨을 뱉어낼 수 있었다. 공간과 풍경도, 늘 그곳에 있는 A도, 다 천천히 기다려줬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늦게 잤고 늦게 일어났다. A가 만들어둔 아침은 점심이 다 돼서야 먹고 오후엔 커피를 한두 잔씩 마셨다. 손님이 머물다 간 방에 같이 앉아 몇 시간동안 새로운 공간 구상에 대해 말하거나, 서로 좋아하는 음악과 영상을 감상하기도 했다. 늦은 밤에는 야식으로 술과 음식들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순간들은 어느 것 하나 급한 거 없이 천천히 흘렀다.

 

뭐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이 여행에서 한 거라고는 먹고 자고 실컷 수다 떤 게 전부니까. 오히려 ‘하지 않는’ 여행에 가까웠다. 해안도로 드라이브도 내소사나 채석강 관광도 없었다. 길지 않은 기간 탓에 애초에 많은 걸 계획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둘째 날에 근처 바닷가 산책을 하기로 한 것조차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무산됐다. 결국 나는 펜션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집구석도 아니고 2시간 거리나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갔는데. 참 별다를 게 없던 내 겨울여행은 그렇게 시시하게 끝이 났다.

 

충분했다. 그럼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숨을 내뱉는 시간이었으므로. 작은 틈에 멈추어, 가만히 머무를 수 있게 한 여행이었으니 말이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 날들 사이로 짧게 맛 본 무언가를 하지 않는 날들은 일종의 해방이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짐에서 잠시나마 벗어났던 거겠지. 다시 짊어져야 한다. 어깨는 도로 무거워질 거다. 그래도 적어도 호흡은 가다듬었으니까. 고요하고 느린 순간들 속에서 게으름 만끽하며 숨 고를 수 있었으니까. 이제 크게 한번 들이쉬어야겠다. 일단 한학기만 좀 버텨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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