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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계피 Sep 12. 2022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예술인은 누가 보호하지?

프로 생활문학인의 생존?

나는 올해 초 한겨레가 진행하는 프로젝트9이라는 프로젝트에 멤버로 초대받았다. 눈치를 살피니 내가 마지막 멤버였다. 마지막이라니, 열 몇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다원예술 프로젝트에 내가 마지막 멤버라니. 답지 않게 긴장을 했다. 나는 최대한 조신하게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려고 했으나, 눈치를 보아하니 의견이 모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여하신 작가님들이 모두 서로를 배려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잃을 신의도 명예도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어필했다. 작가님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종합하여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출판팀은 “새천년 건강체조”를 영화팀은 “당근 마켓”을 중심으로 아이디어들이 종합됐다.


하지만 엎어졌다.


모든 게.

왜?


오늘은 이 자리를 빌려 프로젝트가 진행되다가 엎어지는 경우, 작가의 권리와 생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참, 본격적으로 글을 진행하기 전에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신 작가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한겨레엔과 우리가 맺은 협약은 간단하다.


“약 6개월 동안 협력을 맺고, 예술활동 지원비를 지급한다.”
“특별한 사유 없이 계약기간 만료 이전에 본 협력의 해지를 원할 경우에는 해지일로부터 30일 이전에 그 의사를 서로 간에 직접 전달하여야 한다.”


이러한 조항이 있었으나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기획자와 한겨레엔 간의 불화가 있었고 상호 간의 대처를 감정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지점은 한겨레엔에서 기획자가 퇴사한 이후에도 한겨레엔과의 커뮤니케이션과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네? 기획자가 퇴사요? 혼자서요? 그렇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면 기사까지 나온 프로젝트가 진행되는데 팀도 없이 혼자서 업무를 감당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직접 확인해 본 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본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담당 기획자 혼자였다. 서브 기획자를 붙이든 뭐든 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나의 질문에 한겨레엔의 대답은 우리는 교육기획을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고, 그럴 인력도 없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팩트, 한겨레엔과 기획자의 불화로 갑자기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한겨레엔 측은 이 일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서명한 협약서가 있으나 문제가 있으면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하거나, 우리랑 척져서 좋을 것 없다는 식으로 발화하는 이 상황이 나는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출판팀의 원고를 원고료와 인세가 명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 작업을 했다. 우리가 맺은 협약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엔은 출판, 음악, 영화, 전시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기획자가빠진다고 프로젝트 전체를 엎어버리기를 결정했다.
이미 회사에서 퇴사한 기획자가 한겨레의 많은 요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총괄 자리를 내려 놓겠다고 했다는 말 한 마디에. 감정적으로.


한겨레엔과 기획자 사이에 무슨 불화가 있었든지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둘의 문제고, 둘의 문제로 인해 생긴 문제들을 왜 예술가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맺은 협약은 한겨레엔과 맺은 협약이지만 한겨레엔에서는 지금 자신들의 책임을 일부 인정(일이 이렇게 돼서 아쉽다는 말이 전부긴)하지만 프로젝트를 계속할 마음이 없다며 “종결 서류”를 보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종결 서류에 서명을 하게 되면? 나는 영원히 이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물을 수 없다. 나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 일로 참여한 예술가들 외에도 한겨레엔 직원들 역시 상처받고 있다. 본 업이 기획자 겸 작가라고 말한 바 있는 나로서는, 사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프로젝트와 감정은 별개의 문제다. 내 기분과 감정이 상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과는 분리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프로젝트 담당 기획자이자 PM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주님을 찾으며 담배를 찾아 헤매곤 한다(이제는 금연뿐이라, 주님만 찾을 생각이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나의 감정을 결부 짓는 순간에 프로젝트는 무너지고 만다. 특히 이와 같은 문화기획 프로젝트는 더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상처를 배제하고 생각해 보자.


나도 상처받았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아마도 조금은 상처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잠시만 그 상처를 배제해 보자.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가끔은 나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내가 들을 말, 분위기, 태도와 언술을 종합하여 봤을 때 결국 이 일은 한겨레엔과 담당 기획자 사이의 불화로 인하여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1년 가까이 노력한 결과물들이 아예 무용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다.



이 일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매달 한겨레엔으로부터 받는 20만 원은 적은 돈은 아니지만 큰돈도 아니기에, 모든 예술인들은 아마도 이 돈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한겨레에는 그동안의 ‘정’을 생각하여 활동 지원금을 회수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 아티스트분들의 각자 다른 의견을 존중하며 종결 서류를 보내겠다고 하고 있다.
넷째, 앞으로 교육과 강의에 대한 부분으로 지속적으로 아티스트분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포맷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돈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강의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의견을 추합 하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 이 모든 것에는 결국 위계가 있다.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한겨레엔과 기획자 사이에는 위계가 없었을까? 그 위계가 무엇인지 한겨레엔의 외부에 있던 나로서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 내가 겪은 위계를 말하기에 내 위치가 적절하지 못한 위치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한겨레엔은 출판을 약속했고, 전시를 약속했고, 음악을 약속했고, 영화를 약속했다.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모든 약속이 어긋나고 있다. 한겨레엔은 일이 이렇게 돼 아쉽다는 말만 하고 있다.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나는 책임을 물었으나 대응하실 것이 있으면 하시고, 기획자와 원만하게 합의되길 바란다는 답변을 들었다.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책임은 협약서를 맺은 한겨레엔에 있는 걸까, 나를 불러온 기획자에게 있는 걸까.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와장창 엎어져서 다시는 붙이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만큼은 나왔으면 좋겠다. 한겨레엔이 프로젝트를 종결하는 종결 서류를 보내겠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히 법률 자문을 받은 행위라고 짐작한다. 나는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프로젝트가 엎어졌고 나는 매달 받던 20만 원을 잃고 한겨레엔에 대한 신뢰도 잃었으나 한겨레엔은 앞으로 강의 등으로 좋은 인연을 지속하자는 위계적인 발언을 했다.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나는 예술가분들을 설득해 일부라도 다시 진행하고자 했으나 한겨레엔 측은 예술가들의 의견이 다 다르기 때문에 자기들도 입장이 난처하다며 수동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신뢰는 기획자에 대한 신뢰였고 기획자가 그 신뢰를 저버렸으니 모든 책임이 기획자에게 있다는 식이, 그들의 주요 논리 골자이며 내가 전달받은 문자와 전화, 그리고 녹취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속상한 마음이 크지만 내가 누구를 향해 화를 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 생존권에 대해서 생각한다. 30일 이전에 고지하라고 하던 내용은 누구를 위해서 있던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고작 20만 원을 놓고 내 생존권을 운운하는 게 웃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돈으로 나는 내가 사는 전셋집의 이자 일부를 감당하고 있었다. 나는 매달 월급을 받고 있으나 한겨레엔이 약속한 금액으로 내 미래를 20만 원만큼 늘렸는데 30일의 통지도 없이 갑자기 이 일을 더는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렇게 알라는 말을 하고 있다. 내 생존권은 누가 보장해 주나? 한겨레엔에서 종결 서류를 보내겠다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고 말하는 상황에서 나는? 나의 생존권을 위해서는 사실 이 글도 써서는 안 되는 글이 아닐까? 내가 소위 잘 나가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한겨레엔에서 강의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해버려도 되는 일일까? 나의 생존권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프로젝트가 엎어졌고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프로젝트가 엎어졌고 나도 엎어졌다. 내가 1년의 기간 동안 준비해 온 모든 일이 어긋나고 있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나는 회피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고료와 인세, 그리고 1년 동안 노력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구두로 약속 된 강의도, 계획서까지 작성해서 넘긴 강좌도 모조리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겨레엔은 기획자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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