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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이너 Aug 15. 2019

미니멀리스트 로펌변호사가 사는 법

마이너 변호사의 로펌 생존기 - 제1편 사무실과 업무처리 방식

나 김마이너는 미니멀리스트이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와 무언가 어울리지 않지만 직업은 로펌변호사이다.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면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 비주류 문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로펌이라 하면 한국 사회의 메이저 트랙을 성실하게 밟아 온 성취지향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미니멀리즘은 이 곳에서 더더욱 비주류 문화가 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미니멀리스트인 내가 로펌에서 겪는 우여곡절과 직장생활에서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1. 김마이너의 사무실은 유령오피스?


로펌에는 보통 변호사마다 각자의 방이 주어지는데 방에는 컴퓨터와 모니터가 놓여져 있는 책상이 있고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이 있다. 로펌변호사는 집보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므로 각자의 사무실을 집처럼 차려놓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렇게 차린 사무실은 동료들에게 자기가 사무실에서 얼마나 집처럼 생활하며 일을 열심히 하는지를 은연 중에 보여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내 사무실에는 물건이 정말 없는 편이다. 회사에서 기본적으로 주어진 책상과 의자, 책장을 제외하고는 내가 가져온 것은 선풍기 정도밖엔 없는 것 같다. 어떤 선배가 내 방에 놀러와서는 "너 방은 휑 해서 무슨 유령오피스 같다"고까지 했으니(웃음). 다른 동료들 방에 웬만하면 다 있는 물건들이 미니멀리스트인 내게는 왜 필요가 없는지 하나하나 따져보자. 


사건기록 : 사건이 종결되면 불필요하게 책장에 사건기록을 쌓아두지 않고 회사 내부규정에 따라 사건기록을 바로바로 처리한다. 그리고 이제는 디지털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회사에서도 웬만하면 종이기록을 만들지 않고 컴퓨터 전산상에 사건기록을 저장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다른 동료들은 사건기록 외에도 전상상에 저장된 자료들을 출력하여 따로 하드카피 파일로 만들어서 보고는 하는데, 나는 모든 자료들은 컴퓨터상으로만 보고 따로 자료를 출력해서 하드카피로 보지 않는다. 자료를 하드카피로 보관하게 되는 경우 전산상에서처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어렵고 어디에다 놔두었는지 까먹기도 하며 무엇보다 불필요하게 종이를 낭비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책 : 회사에는 사내 도서관이 있어서 웬만한 법학서적들은 여기서 다 빌릴 수 있고 혹시 없는 책들은 그 책을 가지고 있는 선배 방에 찾아가 빌리면 된다. 관련 업무를 할 때만 가끔 참고하는 법학서적들을 굳이 각자 방에 하나씩 사서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책을 만드는 데 드는 종이와 책이 차지하는 공간, 그리고 책을 사는 데 드는 비용 모든 측면에서 보더라도 책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또한 나는 업무를 할 때 특히 자주 참고하는 기본적인 법학서적들은 PDF 파일 형태로 컴퓨터에 저장해서 바로 컴퓨터상으로 찾아보는 편이다. 
라꾸라꾸 또는 리클라이너 : 로펌에서의 업무는 과중한 편이라 야근이 잦은 편이다. 오랜 시간 일하는 만큼 중간중간 방에서 잠시 잠을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라꾸라꾸 또는 리클라이너를 방에 갖다 놓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졸릴 때면 그냥 의자에 뒤로 기대서 잠시 잠을 청하거나 업무에 지장이 올 정도로 심하게 졸리면 회사와 5분 거리에 있는 집에 가서 자고 온다. 그리고 라꾸라꾸나 리클라이너는 안그래도 좁은 내 방을 더 좁게 만들 것 같다.. 
가습기, 공기청정기 : 성향 자체가 예민하지 않게 태어난 것인지 딱히 공기에도 그렇게 민감하지 않다. 새로운 전자기기를 들이는 것은 나에게는 큰 부담이고 필요하다면 되도록 환경을 위해서 천연적인 재료(예를 들어 식물이나 숯)로 대체하는 방안을 선택하고 싶다.   
화분 : 사무실에 화분을 놓으면 확실히 분위기도 좋아지고 하지만 내 사무실은 바깥 창문이 없는 내측방이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데 식물에게까지 햇빛이 없는 생활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때 맞춰 화분에 물을 줄 자신이 없다(내 앞가림도 안 되는데 무슨...).       


많은 선배들은 이런 내 방을 보고는 방에 물건 좀 갖다 놓으라고, 책장에 책도 좀 꽂아넣으라고 얘기한다. 그럴 때면 나는 "제가 미니멀리스트라서..."하고 그저 웃는다(웃음). 선배들은 이런 내 대답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물론 선배들 입장에서는 사무실에 사건기록과 책이 빼곡하게 있지 않으면 뭔가 열심히 일하는 프로페셔널한 로펌 변호사의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거기에 물건까지 없으면 회사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언제든 떠날 기세인가 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정착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 자신의 물건 보따리를 비로소 풀어놓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생각들이 다수 주류의 당연한 생각이다. 회사에서도 미니멀리즘적 사고는 아직까지는 너무나도 비주류에 속하는 것이어서 다수 주류를 이해시키기에는 역부족이고 그로 인해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불필요한 사건기록을 정리한 내 방을 보고 모 선배는 다른 동료에게 김마이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이냐고 의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회사 내 평가 때문에 자신이 가진 미니멀리즘적 성향을 바꾸는 것은 마치 큰 옷에 맞추기 위해 자기 몸을 살찌우는 것과 같이 미련한 일이 아닐까? 이 시대 아직 비주류 문화에 속하는 미니멀리스트들은 다수 주류의 달갑지 않은 시선에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2. 김마이너의 업무처리 방식은 무지 단순하다(그래서 효율적이다).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뇌 속

바야흐로 정보화 시대 답게 우리는 매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 대며 살고 있다. 신문, 뉴스, 인터넷, 심지어 동료들 간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저런 정보들이 넘쳐나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정보를 주체적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정보에 치여 살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추구하지만 산더미 같이 쌓인 불필요한 정보들은 정작 우리의 정신만 산만하게 하고 우리의 시간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는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 겠지만, 로펌에서는 한번에 한 사건만 수행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사건들을 수행해야 하고 회사에 있는 시간이 이메일 응답, 서면 작성, 재판 출석, 각종 회의 등으로 정신 없게 돌아간다. 그래서 로펌에서는 특히 멀티태스킹 능력이 중요시 된다고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멀티태스킹 능력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한 순간에는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처리하되 그동안 나머지 일들은 머릿속 저편으로 잊어버리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한 순간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주의력을 최대한 적은 대상에 쏟아붓는 것으로서 이는 미니멀리즘을 업무처리 방식에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 순간에 한 가지 일만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일에 온전히 집중하게 되고 좀더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한번에 정신 없이 이것저것 신경쓰려고 하다 보면 어느 것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이 일을 하다가도 저 일이 생각나고 저 일을 하다가도 이 일이 생각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에서 말한 '한 순간에는 한 가지 일만 한다'는 원칙을 업무처리의 대원칙으로 삼고 업무 전반에 이를 적용해서 일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로펌에서는 메일이 정말 하루에도 몇십개씩 쏟아지는데 메일이 올 때마다 하나하나 확인하면 중간에 집중이 끊겨 원래 하던 일을 잘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집중해서 서면을 작성하는 등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바로바로 메일 확인하는 것을 좀 미루고 일정한 시간마다 한꺼번에 몰아서 메일 확인을 한다. 그것도 모든 메일을 하나하나 시간 들여 읽지 않고 제목을 보고 완전히 관련이 없는 메일은 꼼꼼히 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업무를 할 때 각 업무마다 시간을 나눠배정해서 그 시간에는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고 또 다른 시간에는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그 덕에 나는 많은 시간을 아끼고 있다. 


또한, 로펌에서의 주된 업무는 바로 서면을 작성하는 일인데 한 순간에 한 가지 일만 한다는 원칙은 서면 작성을 할 때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나는 참고로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극심한 완벽주의에 시달려 레포트를 쓸 때 한 문단을 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고쳐쓰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나서야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어쩔 수 없이 정해진 데드라인까지 서면을 쓰는 연습을 하다보니 나만의 효율적인 서면 작성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내가 서면을 작성하는 방식은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 지는데, 첫번째 단계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서면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들을 모두 써 넣는 작업이다. 이 단계에서는 이 내용이 들어가는 게 맞나 하고 너무 깊게 생각하거나 표현을 너무 신경쓰거나 하지 않고 법학서적들을 참고하면서 약간은 의식의 흐름으로 일단 쭉쭉 초안을 작성한다. 그리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첫번째 단계에서 써 놓은 내용들을 논리의 흐름이 자연스럽도록 재배치하거나 논리적 비약이 있는 부분은 내용을 보완하고 또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다듬는다. 이처럼 크게 내용과 형식의 두 단계로 나누어 서면을 작성하게 되면 내용을 작성하면서 세세한 표현까지 신경쓰느라 진척이 안 되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어서 그 덕에 시간도 절약하고 서면 작성의 부담도 줄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미니멀리즘적 사고를 회사 업무 처리 방식에 적용하면 회사에서 업무처리를 좀더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니멀리즘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대개 물건이 별로 없는 깔끔한 집에서의 생활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집에서 만큼 회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대 직장인들에게는 회사라는 생활공간 또한 미니멀리즘을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장이 된다. 미니멀리즘은 집에서의 생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편에서는 사무실이라는 공간적 측면과 업무처리 방식에서의 미니멀리즘에 대해 나누어 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좀더 근본적으로 로펌에서의 인간관계 내지 사회생활, 김마이너가 일을 하는 이유 등에 대한 깊은 이야기로 다시 찾아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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