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는 왜 쳇바퀴를 도는걸까
<내 법대로 산다 - 여름 편>
몇 개월 간의 백수생활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게 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데 정말 도움이 되었다. 그치만 이것도 몇 달째로 길어지다 보니 점차 무료해지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계속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간사하게도 백수생활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던 것을 넘어 무언가 다른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역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게 인간이라더니...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무엇보다 결혼을 앞둔 시기, 프리랜서인 여자친구도 코로나의 여파로 일이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마냥 여유를 즐기며 책 원고 쓰기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두발 벗고 나서야 할 때였다. 우리의 행복한 결혼생활의 물질적 기반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어깨 한켠에 가장의 무게가 몇그램 정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백수를 탈출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변경된 프로필처럼 나는 이제 백수에서 벗어나 인디펜던트 워커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인디펜던트 워커'라는 용어는 내가 이전글에서 백수생활 와중에 사건 한건을 맡고 있다고 하니, 어떤 독자분이 '백수와 인디펜던트 워커의 사이시군요!'하고 댓글로 알려주신 건데 그 단어의 어감이 왠지 좋았다(어릴 때 본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가 떠오르기도 하고). 인디펜던트 워커란 조직에서 벗어나 홀로 일하는, 요즘 세상에 점점 더 많아지는 독립적인 근로자를 말한다고 한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그냥 '내 법대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나도 어떻게 보면 이런 인디펜던트 워커로서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다.
변호사 개업
앞에서 말했듯 백수생활 와중에 사건 한건을 맡아 수행한 적이 있다. 로펌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정말 열심히 일을 해주었던 고객인데, 내가 퇴사하고 난 후 연락이 와서 새로운 사건을 부탁해 엉겁결에 맡게 되었다. 어쨌든 회사에 그냥 계속 맡길 수도 있었는데, 나를 기억하고 찾아준 고객에게 감사했다. 사무실도, 직원도, 명함도, 홍보용 블로그도 변호사 개업을 위한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간단히 사업자등록만 내고 바로 일에 뛰어들었다(변호사란 직업은 생각보다 일을 하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물론 혼자 사건을 맡아 처리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여러 우여곡절도 많았다. 로펌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옆방 선배에게 찾아가 조언을 받을 수도 없었고, 전문 직원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실무적인 세세한 절차까지 직접 하나하나 찾아봐야 해서 골머리를 썩었다. 그치만 그만큼 두배, 새배로 더 열심히 찾아보고 궁리하면서 소송실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로펌을 독립해서 내 사무소 이름으로 첫사건 첫서면을 냈을 때의 그 희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서면을 읽어보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줘서 감동했다는 고객의 말에 나도 감동을 느꼈다. 변호사 업무를 쉬려고 로펌을 뛰쳐나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개월만에 어느새 다시 변호사 업무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 개업변호사가 된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내가 로펌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 사건 문의가 들어왔고 그 중 몇건을 또 맡게 되어 진행 중이다. 얼마 전에는 개업 후 처음으로 극히 가능성이 낮았던 사건이 기적적으로 승소하는 아주 짜릿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현재 사무실도 얻고 점차 더 준비를 해가면서 어엿한 초보 개업변호사로서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로펌이라는 잘 정비된 체제를 벗어나 혼자서 일한다는 것은 물론 어렵고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지만, 내 방식대로 해나갈 수 있어 흥미롭기도 하다. 변호사 업무 외에도 하고 싶은 일들이 많지만 변호사라는 본업은 앞으로도 계속할 것 같다.
로스쿨 자소서 컨설팅
로스쿨에 입학할 때 자소서를 꽤 공들여 썼었고 입학 이후에도 후배들 자소서 봐주는 것을 자처할 정도로 자소서에 관심이 많았다. 비록 몇장의 자소서지만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압축적으로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친구의 자소서를 보면 그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피부로 느껴져서 도와주는 나조차도 기운을 얻게 된다. 또한 내 스스로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만큼 후배들이 자소서를 준비할 때 입시만을 위한 자소설이 아니라 진로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이 깃든 자소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다. 예전부터 해오던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시켜 '진짜 한번 추진해볼까?'란 생각이 들었고 결국 로스쿨 자소서 컨설팅 서비스를 런칭하게 되었다. 예상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신청을 하고 의욕과다로 너무 많은 학생들을 받아 한동안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보람찬 시간이었다. 엊그제 드디어 자소서 제출이 다 끝났는데 수강생들로부터 쏟아지는 감사의 표시에 무한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이를 계기로 회사에 소속되어 주어지는 업무나 전통적인 변호사 업무 외에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영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인터넷쇼핑몰 사진기사 겸 대표모델?
여자친구가 코로나 때문에 하던 일이 줄어들자 예전에 하던 인터넷쇼핑몰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내 일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여자친구 일을 도와줘야했다. 그 덕에 새로운 재밌는 경험들을 많이 했다. 새벽에 같이 동대문에 가서 도매 옷을 떼오기도 하고, 사진을 진짜 못찍어서 똥손이라 불리던 내가 쇼핑몰에 올릴 여자친구 옷사진을 직접 찍어주고 있다(웃음). 급기야 커플 아이템의 경우에는 직접 남자모델을 하고 있으니... 인생사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근데 막상 찍힌 사진을 보니 빠른 시일내 다른 모델을 구해야 할 것 같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쉰 만큼 의욕과다로 일하다 보니 어째 회사 다닐 때만큼 바빠졌다. 금액적으로는 일시적으로 회사 다닐 때 월급의 두배를 찍기도 했지만, 개량한복을 입고 거리를 거닐던 여유 넘치던 삶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너무 바쁜 생활이 반복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지치기도 했다. 백수일 때 그렇게 많이 보였던 참새와 직박구리는 이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참새와 직박구리를 대신하여 뜻밖에도 다람쥐가 내게 위안을 주었다. 생존을 위해 도토리를 악착같이 모으면서도 어렵게 모은 도토리 위치를 까먹는 인간미?를 보여주는, 또 그로 인해 얼떨결에 숲을 수호하는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는 사실 내 최애동물이다. 등산할 때마다 다람쥐를 마주치게 되길 고대하고 다람쥐를 발견하면 넋놓고 바라보게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그런데 사무실 근처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어떤 건물 앞마당에 다람쥐들이 살고 있는 케이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멀지 않은 도심 한복판에! 그 이후로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다람쥐를 보러가 도토리를 까먹고 쳇바퀴를 도는 귀여운 다람쥐의 모습을 푹빠져 바라보는 게 습관이 됐다.
다람쥐는 쳇바퀴 도는 것을 즐기고 있는게 아닐까?
한번은 여느때처럼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그런 다람쥐를 보고 "쟤는 왜 제자리에서 계속 쳇바퀴를 도는 거지. 바보 같네."라고 비웃는 것이 아닌가. 다람쥐 매니아로서 기분이 참 나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다람쥐가 제자리를 돌고 있을 뿐임을 미처 알지 못하고 바보같이 쳇바퀴를 도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굴리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유심히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의 몸놀림이 얼마나 경쾌하고 신명나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람쥐는 쳇바퀴 도는 일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그런 다람쥐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난 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쁘게 반복되는 생활에 불평불만이 많아진 내가 다람쥐처럼 그 생활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을 함으로써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게 해줄 기반을 다지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값진 일일까. 게다가 나는 감사하게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조그만 다람쥐 선생은 나에게 중요한 교훈을 몸소 보여주었다.
김마이너가 사는 법 제n조 :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쁘게 반복되는 일상 또한 즐겨보자.
그동안 여러가지 일들로 바빠서 너무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브런치에 접속도 못하고 동료 작가분들 글도 못읽고 너무 그리웠어요ㅜ
여름편으로 매거진을 연재할 계획이었는데 두편도 채 쓰지 못하고 벌써 선선한 가을이 되었네요ㅋㅋ
그래도 이제 바빴던 일들이 좀 정리돼서 다시 분발하여 그간의 얘기들을 부지런하게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