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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녕 Dec 23. 2022

잔치국수 한 그릇

따듯한 위로

“우리 만나서 뭐 먹을래?”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는 날 먹을 음식을 정하느라 몇 주 동안 맛집 리스트를 뒤지느라 바빴다.

무려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아이들 없이 먹는 것이니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자며 난리 법석이었다.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우리의 입맛은 뒷전이고 아이의 입맛위주로 식당을 고르게 된다.

돈가스, 설렁탕, 자장면 빨리 나오고 한 그릇으로 빠르게 먹고 나갈 수 있는, 맛보다는 한 끼 때우는 식의 외식을 주로 해왔던 터라 이런 귀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여기 봐봐 여기 주말에는 오픈 전부터 줄 서있는 곳 이래."

태국 식당, 파스타집, 바비큐식당 평소에 접하기 힘든 음식들, 줄 서서 먹는 식당들의 리스트가 줄줄이 읊어졌다. 그렇게 그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식당들 중에 당장 여행은 못 가지만 음식은 맛보자 라는 취지로 멕시코 식당으로 결정됐다.

어디에 찍어도 바로 SNS에 올려도 될법한 인테리어에 퀘사디아, 포솔레, 화이타 이름만 들어도 이국적인 음식까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이게 퀘사디아인가? 이것도 퀘사디아네?”

 화이타였다.

화이타-비프스테이크, 치킨스테이크, 포크바비큐, 칠리새우와 각종 살사를 토르티야에 싸 먹는 멕시코식 쌈요리로 타코를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알록달록 화려한 플레이팅에 먹기 전에 사진만 수십 장 찍었다. 음료와 함께 한컷, 벽을 배경으로도 한컷, 음식이 식어가는 것은 아랑곳 않고 이곳에 왔다는 증거를 남기기 바빴다.

새콤한 사워크림, 눅진한 과콰몰리, 상큼한 피코 데 가요, 달달한 파인 살사 등과 향신료의 매력적인 맛이 담긴 재료를 골라 먹으니 좋다며 한입한입 즐겁게 먹었다.



“맛있네 맛있는데 뜨끈하고 칼칼한 국물이 먹고 싶다. 그렇지?"

속을 덥혀줄 음식이 생각났지만 동네에서도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변경할 수 없었다. 우리의 자유로운 오늘의 시간에는 그동안 먹을 수 없었던 음식을 먹어야 했다.


피자를 시켰다. 수제맥주도 시켰다.

그동안 아이들과 먹느라 달달한 고구마 피자와 불고기피자 외에는 시도도 못해봤던 르꼴라 피자를 주문해 보았다. 신선한 루꼴라와 짭조름한 소스의 피자와 함께 만원에 네 캔인 편의점 맥주로는 만족 못할 풍미를 가진 향긋한 수제맥주는 아주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오늘 진짜 알차게 잘 먹었다”



잘 먹었는데, 이 허전함은 뭐지

분명히 배부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어딘가 허했다.

따끈한 국물 한 모금 마셨으면

그때 멸치국숫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 이제 집에 가야 했지만 날은 추웠고 우리는 따뜻한 국물이 생각났다. 




어차피 늦은 거 먹고 가자

추운 겨울날,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뭉근하게 끓여 진하게 우린 육수에 찬 물에 바락 바락 씻어 쫄깃해진 소면을 넣고 국간장 휘리릭, 마늘 넣고 소금 넣고 휘향 찬란한 고명 없이 김장 김치 한 가지만 있어도 시원하고 뜨뜻한 한 끼 식사가 되는 잔치 국수.

뜨거울 때 면발만 먼저 한 움큼 집어 후루룩 먹고 그다음은 적당히 식은 국물과 함께 호로록 넘기고 절반정도 남았을 때 매콤한 다진 양념을 섞어 아삭한 김치와 함께 먹으면 속 끝까지 덥혀지는 그 느낌이 생생히 느껴지자 참을 수가 없었다.


                                                           영업 종료

문 앞에 붙은 안내문에 망연자실 해졌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안 먹어도 그만이었던 국수가 냄새도 못 맡고 사라지자 갈망은 더욱 진해졌다.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국숫집을 찾아 헤매었다. 영하 10도 이 추위쯤은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발견한 국숫집은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붙여야 할 만큼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앉아 인원수를 불러주면 삶아지는 국수를 은색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 툭 건네주는, 서빙도 서비스도 없는 좁고 정신없는 곳이었다.

원하는 메뉴를 말하면 가게의 인테리어를 구경할 틈도 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한 그릇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고명이라고는 파와 김가루가 전부인 단순한 잔치국수이지만 받자마자 코를 박을 듯이 먹기 시작했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어야지 생각하는 것은 사치였다. 본능처럼 짭조름하고 시원한 국물을 들이켜고 하늘하늘한 소면을 크게 집어 후루룩후루룩 빨아들였다.

면을 끊지도 않고 흡입하면서도 앞의 김치를 집어 그릇 안에 넣고 다음 한입을 준비하였다.

한입한입 막혔던 속을 시원하게 쓸어내리고 비었던 온기를 채워주는 맛이었다.

맛있다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42000원짜리 화이타도 21000원짜리 루꼴라 피자도 추운 겨울밤에 먹는 3500원짜리 잔치국수에는 비할 바 못하다는 것을.



“우리 간단하게 국수나 한 그릇 말아먹을까?”

잔치국수는 손이 가는 거에 비해 유난히 간단한 음식 취급을 받는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남들에게 먹어봤다고 자랑할만한 음식도 아니고 SNS에 올릴 화려한 모습도 아닌 그냥 가끔 생각나는 음식.

하지만 다채로운 향신료나 비싼 재료 없이 멸치와 다시마를 기본으로 하는, 오로지 육수의 내공으로 승부를 보는 잔치국수야말로 음식의 고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국수 한 그릇에 당연한 듯 김치는 항아리째 건네주는 인심은 덤.


이만한걸 양껏 먹으라고 퍼주면서 유난 부리지도 않는 그 여유로움에 날카로웠던 신경이 누그러들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넉넉한 인심을 받을 수 있는 잔치국수 한 그릇이야말로 추운 겨울 속 따듯한 위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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