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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이 Jun 01. 2024

8급 한자 자격시험 보는 90년생

말 그대로 8급 한자 자격증 땁니다

그니까. 이걸 왜 봤냐면.


1. 20여 년 전, 유치원생쯤이었다.

 

    - 한자 시험 봐볼래? 책 사줄게! 시험이란 걸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쯤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는지, 한자가 뭔지도 모르는데 한자자격시험을 치를 것을 권유받았다. 시험이 뭔지도 몰랐던 유치원생 박이는 그저 ‘책 사준다.’는 말에 신이 나서 ‘그러겠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을 사는 행위’를 좋아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책은 사놓고 쌓아두기만 했다. 그 말인즉슨, 한자 문제집은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만 5세 짱구 나이 어린이가 한자 문제집을 볼리 만무했다. 한 장도 넘겨보지 않고 시험을 경험 하러 갔다.



2. 낯선 장소였다. 딱딱하고 네모난 책상이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 본 컨데 내 인생 처음 보는 동향형 책상 배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리에 앉아 연필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저 할아버지 봐. 할아버지도 시험 보시나 봐.


사람들 시선 끝에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할아버지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동요하지 않고, 신기하듯 바라보는 아이들 눈길에 다정한 인사를 해주셨다. 시험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시험지에 이름 석 자만 적고, 그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정성스럽게 글을 쓰던 할아버지. 그 모습은 기억 저편에 선명히 새겨져있다.

할아버지 구경만 했던 박이 어린이 자격증 시험 결과는 당연히 낙방이었고, 한자 자격시험은 서서히 잊혀갔다.



3. 캐롤이 울려 퍼질 때쯤, 한 해 동안 내가 이뤄낸 성취는 무엇인지 생각했다. 생각 끝에 회사 이름을 건 성취는 있을지 몰라도, 내 이름을 건 성취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꽤나 씁쓸했다. 그래서 새해가 되자 ‘김박이’ 이름 석 자를 건 성취를 하고 싶었다. 이 와중에 게을러서 노력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성취’가 갖고 싶다. 그러다 생각난 게 20년전에 본 한자 자격시험이었다. 의무교육 12년이면 8급 한자는 당연히 알겠지? 예전에 따지 못(안)한 자격증과 더불어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성취, 의미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한자 자격시험 8급! 갖고 싶다. 



4. 가장 빠른 날짜에 시험 응시 신청을 했다. 하루라도 빨리 성취가 갖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검색했다. <한자 자격시험 8급 기출 문제>


연관 검색어 <7살 한자 자격증>, <초등학교 입학 전 한자 시험>, <유치원생도 볼 수 있는 시험> ….

왜…. 연관 검색어에 성인은 없지? 이 시험 할아버지도 보는 거 아니었나요? (이게 흔했으면 그 할아버지가 기억에 오래 남아있을리 없었다.) 다른 급수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8급 자격시험을 본다는게 잠시 창피해지다 시험장에서 '누가 남을 신경쓰겠냐.'는 마음으로 기출문제를 봤다.


음, 8급 한자는 50자. 심지어 숫자 한자(一 ~ 十)가 포함 되어있으니 10자는 꽁으로 먹고 들어가는군. 그래도 나름 자격증 시험을 보는 거니까 기출문제집을 사볼까?



5. 알리딘으로 <초등 하루 5분 한자> 문제집을 샀다. 초등 문제집이라서 그런지 첫 페이지는 자기소개 작성 페이지다.(귀엽네) 생년월일을 쓰는 칸에 기본적으로 ‘20__년’이 적혀있다. 20에 엑스를 쫙쫙 긋고 썼다. 19XX년.



6. <좌우명을 쓰세요.>


아, 이 어른들도 답하지 못하면서 어린이에게 이런 어려운 질문을 하다니. 너무하군!


건 강 하 기


또박 또박 써낸 어른의 좌우명이다. 어린이들아, 너희에게는 기본 옵션 같은 강철 체력이 어른들은 유료 옵션이란다. 안 그래도 방금 필라테스 200만 원을 긁고 왔단다. 너희의 의무교육에는 매주 2시간씩 체육 수업이 있지만 어른은 돈내고 운동 시켜달라 부탁해야 된단다. 왜 그러냐고? 나도 알고 싶다. 그 많던 근육은 어디로 가고 출렁이는 살로 바뀐 건지, 어른도 전부를 알진 못한단다.



7. 자기소개 페이지를 한참 작성하고 드디어 한 장 넘겼다. 어? 8급 한자를 내가 모르네?

한자 뜻음을 알긴하다. 그런데 한자를 이미지로 기억하다 보니 비슷하게 그릴 순 있지만 세부 획은 다 틀리는 거다. 아, 이러면 계획에 어긋나는데…. 하지만 난 의무교육 12년을 끝낸 성인. 이 정도 쯤이야 시험 하루 전에 봐도 되겠지! (이렇게 또 한번 미뤄봅니다.)



8. 시험 하루 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한자를 손으로 써본 게 얼마 만이더라. 10년 만인가? 아, 자주 쓰는 한자. 하나 있네. 많을 다(多), 회의록에 써댄 '변동가능성 다(多)'. 잠시 눈물을 훔친다.


헛 참, 이러면 안 되지. 뜻음을 한번씩 보자. …어? 왜 뫼-산(山)이 산-산(山)이야? 동녘-동(東)이 동쪽-동(東)이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나. 한자 뜻음도 바뀐다. 시험에서 <산(山) 뜻을 쓰세요>라 했을 때 <뫼>라 답하면 연륜을 들킬 수 있으니 요즘 나오는 뜻음을 머릿속에 재입력 한다.



9. 시험까지 남은 시간 12시간. 잠자는 시간 제외하면 4시간. 너무 미뤘더니 시간이 없네? 시간 없으니 이미지 연상 법으로 외운다!


동쪽-동(東)은 나무(木)에 해(日)가 걸린 모습, 군인-군(軍)은 민자 군모를 쓴 것 같이 생겼고, 북(北)은…. 뉴스에서 많이 봐서 익숙하군. 가르칠-교(敎), 아 애들 가르치는게 어려우니 엑스(X)가 있고, 학교-교(校) 한자 왜이렇게 헷갈리냐. 육(六)자 비슷한거 있는거. 



10.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장에 갔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한자시험장은 핫플레이스 그 자체였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알았다. 아, 자리에 앉은 성인은 나뿐이구나.(유일할줄은 몰랐다.)


서있을 때는 아이 자리 찾아주는 어른들이 많아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에 앉으니, 앉아있는 아이들 사이에 나 홀로 우뚝 쏟아 있다. 그제야 어른들 얼굴이 보인다. 내 또래들이다. 내가 애를 조금만 일찍 낳았다면 시험 보는 학생이 아니라 학부모로 왔겠구나.



11. 제 자식의 첫 시험을 기념하는 듯 사방에서는 찰칵이는 셔터 음이 들린다. 마스크 쓰고 올걸. 누가 봐도 우뚝 쏟아있는 내가 사진에 같이 찍히겠다는 생각에 얼굴이 터질 것 같다. 허리를 굽혀 작은 척해 본다. 20년 전 할아버지, 그때 시험 어떻게 보셨어요? 아, 사진 찍히시진 않았겠네요. 저는 조만간 어디 블로그에 사진이 올라갈 것 같아요. …모자이크 해주겠죠?



12. 시험 시작 15분을 앞두고 시험관이 외쳤다.


- 보호자분들, 아이들이 시험을 잘 보려면 혼자 정리할 시간을 주셔야 해요. 자리에 앉은 걸 확인 하셨으면 아이들을 믿고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어른들로 북적이던 교실이 정리되었다. 드디어 벌게진 얼굴이 제 색을 되찾아간다.



13. 

- 신분증과 검정 펜 이외에는 모두 가방에 넣어주세요! 한자가 쓰여있는 어떤 것도 책상에 올리면 안 됩니다!


주민등록증에 한자 안 쓰여있는 사람이 있나? 요즘에는 한글 이름이 많아서 그런가? 내 이름에는 8급 한자는 없으니까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옆자리를 봤는데 웬 퍼런 여권이 놓여 있다.


그렇다. 아이들은 아직 주민등록증이 없다. 다들 퍼런 여권을 올려두었는데 혼자 살구색 주민등록증을 올려두는구나. 옆에 앉은 아이 생년월일이 힐끔 보였는데 2016년생이다. 내 학번보다도 어린아이구나. 창피함이 다시 물 밀 듯 몰려온다. 뭘하자고 여기 왔지? 노력 없는 성취를 얻는다고 해서 내 인생에 딱히 나아지지도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왜, 굳이, 이 시험을 보기 위해 여기에 앉아있는 걸까.



14. 머릿속 물음이 입 밖 한숨으로 나오기 직전 감독관 선생님이 말하신다.


- 친구들! 우리는 지금부터 한자 시험을 볼거예요. 그런데 시험은 왜 보는 걸까요?


그러게요. 제가 지금 가장 알고 싶네요.


- 제가 배운 것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요!

- 맞아요! 벌써 정답이 나왔네요. 우리가 시험을 보는 이유는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아는 것을 확인만 한다면 시험을 볼 필요는 없겠죠. 그보단 어떤 걸 모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험 보는 거예요.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걸 잘 몰랐는지 알고 가는 게 훨씬 중요하답니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시험을 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핸드폰 소액 결제를 못하던 시절. 중간고사, 기말고사 학기당 2번씩 1년에 총 4번 시험 봤다. 거기에 중간중간 수행 평가나 단원 평가도 있었다. 그 평가들에서 나는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시험을 봤던가? 아니. 아는 문제를 틀렸다고 엉엉 울어 대보고, 바꾸기 전 답이 정답이어서 화도 내보고, 가채점할 때 빗금 쳐지면 울상이 되고, 3단 4단 눈사람이 만들어지면 입이 헤 벌려지는 그런 시험들을 봐왔는데. 1점 2점에 울고 웃었는데. 채점이 끝나고 틀렸던 문제들의 정답을 보긴 했을까요? 

의무교육 12년을 다 마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8급 한자들 중 어떤걸 잘 몰랐는지 알 수 있겠네요. 틀릴 거면 그냥 제대로 틀려버리겠어요! 확실히 기억하게.



15. 회색 갱지 시험지가 나눠졌다. 문제를 푸는데 학교에서 시험 보던 습관이 남아 있다. 질문지에 쓰여있는 '맞는’, 혹은 ‘틀린’에 동그라미를 치고, 5개의 답을 하나하나 보고, 답 번호 옆에 O, X를 치면서 한문제라도 안 틀리려고 하는게 아닌가! 방금 전에 1점 2점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이렇게 진심으로 시험 보는 거야? 정말!



16. 엥? 이게 뭐예요. 아들-자(子), 위-상(上) 뭐에요. 전 이거 안 외웠단 말이에요. 한자 8급 50자에 없었단 말이에요. 저 틀릴 뻔했잖아요! 이건 또 뭐야. 식물 한자를 제가 어떻게 알아요. 대충 느낌으로 끼워 맞춰 보겠습니다. 어린이 친구들아, 나는 연륜으로 맞췄단다. 너희도 맞췄니?



17. 시험 시간이 끝나고, 시험장 문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 하나 겨우 지나갈 틈만 비워둔 학부모 사이를 지나왔다. 아무도 관심 없는데 나 혼자 기자회견 주차장을 지나가는 죄인마냥 고개를 푹 숙인채 그 길을 지나왔다. 인파 속을 빠져나오니 또래 학부모들이 보인다. 제 자식이 언제 나오나 목 빠지도록 보고, 아이가 나오면 바로 찾아 가서 칭찬 감옥에 가둬주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난다. 

시험 보고 나오는 짧은 시간마저 떼어두기 아까워 문 앞에 다닥다닥 붙어있을 만큼 어린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을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처럼 저 아이들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란 것을. 그러다 시간이 지난 후에 제 또래 부모와 아이를 보면서 이렇게 웃을 것이란 것을. 자신 있게 장담하며 나왔다.



18. 그렇게 90년생 김박이의 8급 한자 자격시험 체험기는 끝났다. 결과는 어떻게 됐냐면요. 붙었어요! 시험 본 사실을 잊을 때쯤 우편으로 합격 통지서와 자격증이 날라옵니다. 뭘 틀린지 봤어야 했는데 점수표를 안봐서 모르겠네요. 그냥 다 맞췄다 생각하고 살죠! 의무교육 12년을 잘 받았다 생각할래요.

그런데요. 8급 한자 자격증이면 8급 한자만 한자로 쓰여있어야되는거 아닙니까? 그래야 8급 한자를 딴 의미가 있죠. 한자로 도배되어 있는 자격증을 보는데 뭐라고 쓰여있는지 모르겠잖아요! 점진적으로 급수가 올라가면서 한자가 많이 쓰여있어야 자격증을 따고, 읽는 맛이 생기죠!


아, 하나 팁을 드리자면 한자 8급 자격 시험에서 한자 쓰는건 안나옵니다. 뜻 음만 봅니다. …하하! (한자쓰기 열나 열심히 연습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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