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경 묵상

은혜와 진리

by 김재광


영국에 CS 루이스라는 분이 계셨는데요, 그 분은 직업이 3개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영문학 전공 교수였고, 다른 하나는 작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변증가였습니다. 우리에게 "나니아 일대기"라는 소설을 쓴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기독교 관련 책으로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이 아주 많이 팔렸습니다. 그 순전한 기독교는 원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달했던 내용을 묶어서 책으로 낸 것인데 당시에 그 방송을 듣고 많은 무신론자들이 다시 기독교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사실 CS 루이스 교수 역시 본인이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으로 회심을 하셨던 분이라 자신이 가졌던 근본적인 의심에 대한 해법을 그 책을 통해 제시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그 책에서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실재는 복잡할 뿐 아니라 대개는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예컨대 지구를 비롯한 여러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그 행성들이 조화를 이루 고 있으리라고-이를테면 행성간 간격이 다 똑같든지 아니면 일정하게 증가할 것이라고, 또 는 행성들의 크기가 다 똑같든지 아니면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더 커지거나 작아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크기에서든 간격에서든 어떤 규칙성이나 동기(우리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떤 행성에는 달이 하나 있고 어떤 행성에는 네 개가 있으며, 어떤 행성에는 두 개가 있고, 어떤 행성에는 하나도 없고, 또 어떤 행성에는 띠가 둘 려 있지요.


사실 실재란 대개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가 늘 예상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우주를 제시한다면, 저는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기독교에도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미숙한 철학들-지나치게 단순한 답들-은 다 제쳐 두기로 합시다. 문제 자체 가 단순하지 않고, 따라서 답 또한 단순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바로 그것인데요 이것은 성경의 곳곳에 나옵니다. 룻기도 그렇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욥기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욥은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는데 아무 이유없는 고난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장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인데 가장 비참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무 부조리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이 기독교가 우리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볼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기묘한 비틀림이 바로 기독교의 은혜를 이해하는 열쇠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8절 본문에서 예수님을 은혜와 진리라고 아주 명쾌하게 정의를 했습니다. 빛으로도 표현되는 진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원리라고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공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정교한 물리적 법칙을 따르며 우리 사회는 인과율에 따릅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그런 인과율은 일찌기 석가모니가 터득한 세상의 운행 원리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은혜가 없다면 어쩌면 기독교는 불교와 크게 구분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다른 한축인 은혜는 무슨 의미일까요?


은혜는 진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플러스 알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는 이 실제 세상의 기묘한 비틀림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관념이 아닌 실제하기 위한 필요 조건입니다. 의인 욥이 고난을 받을수 있는 것처럼 악인들도 구원을 받을수 있게 된 것을 은혜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게 아니기에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악인과 의인 모두에게 동일한 따듯한 햇살을 허락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은혜라고 규정하는 요한의 시각은 예수님이 만인에게 구원의 길을 열으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은혜를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좁게 이해할수도 있지만 좀더 넓게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 자체가 은혜라고 볼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떻게 해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시공간 속으로 육체의 몸을 입고 오실수 있는가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좀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은 생명과 빛으로 정리되는데 이는 성자 예수님을 은혜와 진리로 정리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빛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명이라고 정의한 부분이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이 있고 나서 이 우주시공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은 우주 시공간을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라는 보편자 하에서 수많은 우주 공간이 독립적으로 만들어질수 있고 우리는 그 중의 하나의 우주 공간에 속해 있으므로 그 우주공간을 지배하는 물리법칙의 제한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 위에 계시는 분이니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법칙은 하나님의 법칙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생명이시므로 그 안에 있는 우주 공간은 비록 진리의 법칙 하에 있지만 또한 생명의 법칙 안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의 속성이 이 시공간 안으로 들어온 것을 은혜로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측면이 시공간 안에서 은혜라는 형식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그 은혜는 다름아닌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입니다. 이 물리적 우주 시공간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침투하여 우리 역사를 BC 와 AD 로 나눈 것처럼 그 말씀이 또한 나라는 소우주에 침투하여 동일한 은혜를 경험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은혜를 알지 못하면 말씀이 육신되는 경험이 없는 닫힌 시공간 내에서의 반쪽짜리 믿음인 것이고 그것은 바리새인의 믿음과 본질적으로 다를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라는게 바로 하나님과 온전히 교통하는 영적인 삶의 중요한 하나의 축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간절히 사모하고 균형감있게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조금이나마 알수 있을까요? (이것은 사실 모순된 질문입니다. 은혜는 그 정의상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고린도 전서 13장 9-13절에 그 힌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13: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3:10 온전한 것이 올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3:11 내가 어렸을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3: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은혜가 없이는 우리의 영적 세계가 부분적으로 알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고린도 전서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으로 전달되는게 진리라고 한다면 사랑의 실천이라는 경험을 통해 체험되는 것이 은혜의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댓가를 바라고 계산을 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 죄값을 대신 치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은 우리의 어떠한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될수 있습니다. 그런 실천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수 있다면 그 자체가 곧 은혜일 것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삶가운데 실천해 가면서 좀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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