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이 묵상은 수요기도회에서 나눌 내용입니다)
몇주 전에는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묵상을 나눈적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이웃 사랑에 대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는 주저없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며,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제 예수의 공생애와 더불어 신약시대가 시작되면서 예수는 율법의 핵심인 두 개의 큰 계명이 아니라, ‘하나의 계명’으로 완성된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제시합니다. 결국 예수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 다시말해 ‘인간 사랑’에 중요한 방점이 찍힙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형제 사랑’으로 요약된다면,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본주의 사회에서 신을 향한 거룩한 사랑을 배제한 채 ‘형제 사랑’이 과연 최고 계명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구약 시대의 신본주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시대와 더불어 인본주의로 근본적인 가치관이 변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이 생길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요한일서 4:7-8 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런데 위의 요한 일서 말씀을 잘 읽어보면 그렇지 않은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랑과 우리가 세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랑이 과연 어떻게 다른가요?
위의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사랑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표현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마치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에게 사랑을 주어본 사람이 부모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질수 있는 것이랑 비슷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많이 다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부적인 사랑이고 댓가나 보답을 전제로 하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댓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에게 구원의 기회가 열려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조건없는 사랑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베풀되 상대가 고마와하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의 사랑의 행위에 대한 종속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고 온전히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숙한 사람만이 그런 행동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이 온전히 실천하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최근에 한국에서 안나의 집을 운영하는 신부님에 대한 뉴스를 들었는데요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신부님인데 한국에 오셔서 한국인으로 귀화하셔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 사역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 인터뷰를 보니 매일 매일이 기적이라고 합니다. 하루에 700-800명에게 밥을 먹인다고 하는데 매일 기적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자발적으로 오는 자원봉사자들이 일을 해서 밥을 먹이는 것이니 매일 누가 얼마나 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와서 돈을 주고 가는 것도 기적처럼 매번 경험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삶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러한 일을 실제로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와 희생이 요구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런 희생을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표현한 것도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높히는 길이라는 것이 첫번째 의미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의 또다른 의미는 그것이 기적을 경험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결국 인과관계로부터의 벋어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인과관계로부터 벋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과거로부터 속박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과거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요셉이 자신을 팔았던 형제를 용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을 통해서였습니다. 절대 용서할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게 그게 기적입니다. 우리 사랑의 바운더리를 키워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게 기적인 것인데요, 그게 과거에 속박되는 사람은 결코 할수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 불행한 과거와의 단절은 우리의 현재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해석은 풍성한 상상력의 산물일텐데 이는 결국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의 실천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서로 변증법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더 큰 사랑을 할수 있고 더 큰 사랑을 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은 인간이 취할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위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매슬로라는 학자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성장하는 단계별로 다른 욕구를 가진다고 합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것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욕구인데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느 단계를 지나면 안전욕구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을 찾아서 가정을 꾸리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이지요. 그 안전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존경과 같은 사회적 욕구나 아니면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욕구의 가장 상위에 위치하는 것이 바로 자기 희생이나 기부, 봉사와 같은 자기 초월 욕구입니다. 그건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경지라고 할수 있을텐데요, 예를 들어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게이츠 재단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류에게 필요한 일들을 하는데 돈을 쓰는것 같은 것이 가장 고귀한 행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초월적 행위는 인간을 동물로부터 가장 크게 구분짓는 행위이며 인간을 가장 인간답고 아름답게 만드는 행동인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결국 자기초월적 경험을 통해 인생의 최고 경지를 누려 보라는 권면의 말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