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경 묵상

용서의 힘

창세기 41장 51-52절

by 김재광


41: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41: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은 어린 시절 형제들의 시기 질투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십여 년을 개고생 하다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은 형제를 나중에 용서했는데 예전에 저는 그게 너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로 인해 자신의 삶이 정말 꼬이고 본인은 엄청난 상처를 받았는데..



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요셉이 자신의 고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가해를 했던 형제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는 논리입니다. 그 근거로는 창세기 45장 7-8절의 구절을 들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했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모든 걸 하나님의 섭리로 설명하는 것이라 나에게 적용하기 어려웠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랬던 거라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러셨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악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나온다는 것인데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위의 성경구절에서 요셉이 총리가 되고 아들을 둘 낳았는데 아들 이름을 므낫세에브라임으로 지었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므낫세가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을 가진다고 합니다. 요셉은 첫아들을 낳을 당시 이미 자신의 형제를 용서했다는 게 매우 흥미로왔습니다. 즉,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기 이전에 이미 형제를 용서한 것입니다. 결국 그가 용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 말은 과거를 창조적으로 해석할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적인 해석의 힘은 결국 에브라임(창성함)에서 나왔습니다.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가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오히려 내게 상대가 의도치 않은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고 더 나아가 그게 오늘의 성공의 밑거름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고 온전히 그 과거를 긍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나 자신이 과거에 종속되어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게 되고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용서란 현재 상황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자신의 과거를 창조적으로 해석할 심적 여유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또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창조적으로 해석할 만큼 충분히 성숙해서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즉, 자신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 심리적으로 자신의 과거 가운데 그 원인을 찾게 됩니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고통보다는 설명되는 고통이 훨씬 견디기 쉽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어두운 상황이 주는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과거를 소환해서 아픈 상처를 상기하고 그걸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포지션을 하게 되면 본인의 책임은 사라지면서 싸구려 위로를 얻지만 그 부작용으로 용서를 하기 힘들게 됩니다. 가해자는 나쁜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자신의 피해자 의식을 공고히 하고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남겨둘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 굳이 과거 일을 상기할 필요가 없으니 똑같은 과거라도 용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울했던 과거를 상기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밝은 미래가 용서의 비결인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했던 말입니다. 한일 과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대답이었는데요 저는 이게 엄청난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그건 우리의 의지와 상상력의 힘이기도 합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대로 "지적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적으로 낙관"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용서는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강자가 되는 자격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의 최고봉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화해의 제물로 오신 분입니다. 이는 마치 요셉의 형제가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데 요셉이 먼저 용서를 했던 것처럼 예수님 (즉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이미 용서를 위해서 필요한 액션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삶에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용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랑은 조건부적인 것이고 그것은 용서와는 다릅니다. 용서는 give-and-take의 인과 법칙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질서이자 속성입니다. 세상은 보복과 투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용서와 사랑을 통해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노예해방 운동을 일으킨 마틴 루터 킹 목사나 아니면 영국의 독립운동가 간디 역시 철저히 비폭력적인 사회 운동을 시도했고 그럼으로써 증오의 악순환을 깨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용서의 유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 역시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제 과거를 어둡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용서했는데요 그 이후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용서를 해야 나의 과거가 나의 현재와 미래를 방해하지 않게 됩니다. 용서를 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울이 바울되는 것처럼 이름을 개명하고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가 주는 구속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자기 연민에 빠져서 부정적 감정을 띁어먹고사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스스로 망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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