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경 묵상

베드로의 배신과 회복

by 김재광

(요한복음 21:1-21:14에 대한 묵상입니다. 오늘 저희 교회 수요 기도회에서 나눌 계획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이 돌아가시던 밤 세 번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찾아온 장면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장면이지만 베드로에게 감정 이입을 해서 그 장면을 상상해 보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도 가장 신임받는 수제자였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을 하고 예수님께 큰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입니다. 이건 일종의 중간고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고사에서 베드로는 100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잡히시기 전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다짐하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일까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4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소개되는 일화가 이 베드로의 배신이라고 하니 이건 진짜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간고사에서 100점을 받은 베드로가 기말에서는 빵점을 받은 것과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이 사건을 읽으면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떻게 그걸 아셨을까? 미래라는 게 존재하는 게 아니기에 아무리 전지전능한 분이라고 하더라도 미래라는 것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과 상충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을 테인데 도대체 예수님은 어떻게 베드로가 그런 행동을 할 것을 알았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께 직접 물어봐야 하겠지만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장담을 하고 맹세를 하더라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아직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과 의심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했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인들이 스스로들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자 혹시 내가 그런 건 아닐까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이러한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가졌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이 잡혀가는 날 새벽에 3번 예수를 부인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왜 두려웠을까요? 그 상황이 무서웠고 그 상황에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기도 잡혀가서 고초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 자기도 물 위를 걷겠다고 나섰고 실제로 물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신기한 체험을 다 하고, 예수의 기적을 수없이 목격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저렇게 비겁해진다면 과연 믿음이란 게 무엇인가 하는 회의가 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가졌던 두려움은 과연 그게 전부였을까요?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가졌던 다른 하나의 두려움이 나옵니다. 그건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다른 모든 제자들이 다 배신하더라도 나는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을 때 가졌던 두려움입니다. 그건 바로 예수에게 버림받는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즉, 베드로에게는 두 가지 두려움이 공존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고초를 받는 두려움과 예수에게 버림받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세상의 고초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지만 예수에게 버림받는 건 영원의 영역이므로 전자는 작은 두려움이고 후자는 큰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 힘없이 잡혀가는 그 순간 베드로는 잠시 작은 두려움에 휩쓸려 큰 두려움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작은 두려움에 빠져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찾아오신 장면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작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큰 두려움, 즉 영원에의 소망을 상기시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못난 베드로를 다시 찾아와서 세 번 부인한 것만큼 세 번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얼마나 미안하고 송구스러웠을까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 입장이 아닌 예수님 입장에서 이 장면을 어떻게 생각됩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이 되시는지요?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배신을 괘씸하게 또는 불쌍히 여기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경험을 하셨을까요?


저는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 인생을 경험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셔서 더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마치 제가 아이를 낳고 육아를 경험을 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처럼 하나님도 성육신의 경험을 통해서 그런 과정을 겪으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은 지극히 인본주의적 해석입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이해가 늘어나고 지식을 얻어지지만 하나님은 경험을 통해 지식이 높아지는 것이 아닌 경험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이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비록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예수님 잡혀가는날 새벽닭 울기 전에 3번 예수를 부인하는 경험을 통해서 비로서 깨닫게 되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경험과 상관없이 그전에 이미 베드로가 배신할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에 직접 또는 간접적 경험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해를 얻어내고 전혀 경험하지 않은 영역은 이해가 매우 부실합니다.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그런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얻어졌던 베드로의 믿음은 사실 반쪽자리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다 경험을 할 수도 없고 경험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우리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해를 초월한 영역은 경험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기에 믿음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이 장면을 하나의 드라마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주연, 베드로 조연의 드라마를 만드셔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때 나래티브는 사도 요한이 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요한복음"이라는 제목을 가진 연속극인데요, 그 연속극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파트는 7개의 표적 이야기이고요, 두 번째 파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 두 번째 파트는 13장부터 시작하는데요, 그 13장 1절에 사도 요한이 제2파트에 대한 소개 설명을 합니다. 다 같이 본문 (13장 1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서 사도 요한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바로 제자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표현이 그냥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베드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가셔서 회복시키고 믿음을 주시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조건부 적이고 give-and-take 의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험의 한계와 이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인데 그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주께서 신실하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복음서가 씌여질 당시에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배교가 일어났었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4대복음서에서는 베드로의 배신을 모두 기록함으로써 배교를 경험하면서 상처입은 공동체에게 위로를 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들이 보기에 기라성 같은 베드로 사도도 예전에는 저렇게 믿음이 부족했었어 하면서 위로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베드로처럼 신앙의 슬럼프에 빠졌습니까? 베드로처럼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셨습니까? 베드로처럼 자신에게 낙담하여 감히 예수님 앞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처지입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 예수님과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십자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그 무한하신 사랑이 느껴지시기 않으십니까? 오늘 기도회에서 베드로가 가졌던 작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그런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좁은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