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여름 방학에는 여러 가지로 바쁘긴 했는데 일단 한국에 가야 했다. 카이스트에서 교수 채용과 관련하여 세미나 및 면접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대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기간에 카이스트 수리과학과의 김성호 교수님이 초청을 하셔서 세미나를 했었는데 그때 즈음에 카이스트에 통계학과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김성호 교수님도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으셔서 좋은 후임을 찾으신 것도 있었다.
정식으로 인사 프로세스가 진행된 것은 2015년 5-6월인데 그때에 인터뷰를 하면서 학교 측에 두 가지 정도를 말씀드렸다. 아이오와를 사직하고 카이스트로 가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기에 겸직으로 3년간은 50%만 일하는 조건을 달고 싶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카이스트에 통계학과를 만드는 것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학장님 인터뷰, 교무처장 및 교학 부총장 인터뷰, 총장님 인터뷰에서 다 말씀을 드린 사항이었고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가는 게 별 의미가 없다고도 스스로 생각했었다. 다행히 모두 긍정적으로 답해주셨고 별다른 문제없이 오퍼를 받았다. 다만 겸직 기간이 2년으로 제한되었는데 그래도 한국에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다행히 아이오와에서도 나의 겸직에 대해 이해하고 카이스트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2년간은 아이오와에서 50%, 카이스트에서 50%씩 일을 하는 것인데 실제로 봉급도 딱 반씩 받는 것이었다. 이미 우리 학과에는 중국 북경대와 반반씩 일을 하는 Chen 교수 덕분에 선례가 있어서 진행이 쉬웠다. 돌이켜보면 내가 꼭 한국에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이러한 전대미문의 길을 개척하는 것 자체에서 호기심과 흥미를 느꼈던 것이 더 컸다. 아이오와에서 사표를 내고 가야 하는 것이라면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겠지만 그게 아니라 양다리를 걸치고 결정은 2년 뒤에 하면 되는 것이니 위험부담이 적었다.
또한 카이스트에 통계학과가 없으니 만약 그곳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지도하며 통계학과를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상당히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 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는 것처럼 카이스트에 가기 전에 카이스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는 건 당연했다. 막상 오퍼를 받고 나니 실제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제출해야 할 서류가 엄청나게 많았다. 너무 서류가 많아서 중간에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이 몇 번 들었는데 지원 당시에는 요구하는 서류가 적었는데 막상 일을 하는 데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던 것이다. 이는 마치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하는 건 간단한데 실제 결혼식 할 때까지 준비하는 게 너무 많은 것이랑 비슷할 것이다. 카이스트가 국가 기관이라서 더 서류가 복잡했던 것 같다.
암튼 이렇게 해서 아이오와 교수생활은 2016년 8월까지로 일단락을 내리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아이오와-카이스트 겸직 교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는 계속 변화가 있었는데 그게 처음에는 약간 황당한 꿈이었는데 결국 그게 다 이루어졌다. 내가 유학을 나간 것, 한국에 외대, 연대 교수로 간 것, 거기서 아이오와 주립대 교수로 간 것, 또 여기서 카이스트 교수 겸직을 하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처음에는 황당해 보였는데 결국은 이루어졌다. 특히 카이스트 겸직은 예외를 만들어서 가는 것이라 처음에는 설마 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이 상상을 하는 것이다. 상상하지 않는 것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니.
2016년 8월 21일, 카이스트에서의 첫 학기를 위해 떠나기 직전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1. 이제 한 시간 후면 공항으로 출발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8년간의 미국 생활을 일단락하고 다시 한국에서 생활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8년 전에 연세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떠날 때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지내보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8년 전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싶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부모님들도 만류했었고 주위 사람들도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한국 생활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즐거웠던 일, 괴로왔던 일, 그리고 후회되는 일 그런 것들이 자꾸 생각났다.
3. 내가 미국 이민후 이전의 한국 생활을 상기해 보는 것은 마치 내가 죽어서 이승에서의 삶을 돌이켜 보는 것처럼 아득한 느낌을 주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정말 후회되는 것이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감이 생겼다. 흥미롭게도 미국에서 한국생활을 회고할 때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내가 양심을 속인 사건들에 대한 후회였다. 연구비 카드로 친구들과 밥사먹은것,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는 흔히 말하는 관행 수준의 일들이었지만 그런 것들이 지나고 보니 참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
4. 그래서 그때 그런 기도를 했었던 것 같다. 만약 다시 한국에 돌아간다면 그때에는 정말 잘살고 싶다고. 후회할 일을 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며 살겠노라고.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그렇게 살아갈 때 그게 더 큰 일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되지 않겠는가. 그 기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한국에서 살게 되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