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3년이 씨뿌리는 시기였고, 그 다음 3년이 성장기였다면, 그 다음 시기는 안정기라고 할수 있을 것같다. 안정기는 성장기동안 업그레이드된 시스템이 안정화가 되어서 모든게 순탄하게 굴러가는 상황인데 그 핵심은 선순환 구조에 있다. 연구에 인정을 받으니 연구비도 여유있고 또 우수한 학생이 들어오고, 우수한 학생이 들어오니까 힘도 덜들고 연구 결과도 더 좋아지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초반에는 별로 차이가 안나는데 그 초반 시절을 어떻게 보내고 운이 얼마나 따르냐에 따라서 악순환의 굴레에 빠지느냐 아니면 선순환에 도달하느냐가 갈리는 것이다. 물론 나보다 훨씬 잘나가는 사람들은 더 유명한 대학에서 더 뛰어난 학생들과 더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더 커다란 규모로 선순환의 공장을 돌릴 것이다. 나는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는 톱레벨의 학생들이 찾아오는 연구실을 만들었으니 내 나름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데 성공한 셈이 되었다.
선순환에 접어들면서 2015년부터는 마음에 여유가 좀더 생긴것 같다. 전공서적 외의 독서도 그때부터 좀 하였던것 같고, 교회에서는 성경공부 인도자로 봉사도 했고, 외부 컨설팅이나 학회 출장도 많아졌다. 컨설팅 프로젝트도 제법 했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 농림부에서 지원을 받아 인공위성 판독 자료와 서베이를 결합하여 작물별 농지면적 추정하는 빅데이터 응용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 도중에 다층모형(multi-level model)의 추정에 대해 흥미로운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그걸 가지고 뉴저지에 있는 IBM 연구소에서 발표를 하니 그 당시 그 연구소에서 일하던 황영덕 박사가 자기가 하던 태양열 에너지 예측 문제에 적용할수 있겠다고 해서 응용 논문을 함께 쓰기도 했다. 사용된 방법론 자체는 동일하지만 도메인이 완전히 다르기에 전자는 Journal of Agricultural, Biological, and Environmental Statistics 이라는 저널에 출간을 하였고 후자는 Annals of Applied Statistics 에 출간을 하였다.
또 다른 기억나는 프로젝트는 MEDAIR 라는 회사의 지원으로 시리아 내전 중에 남시리아의 영아 사망률과 영양관련 통계 생산을 위해 respondent driven sampling 을 적용하여 추정을 했었는데 통계학자로서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가난한 나라의 인프라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측면에서 보람스러웠다. 또한 USAID 라는 기관에서 지원을 받아 과테말라 빈곤/영양 관련 통계를 data integration 방법을 개발해서 적용한 프로젝트도 했었는데 그건 이탈리아 통계 저널에 출간하였다. 이 모든게 나 혼자서는 할수 없는 것이고, 연구실에 좋은 학생이 있어야 하고, 또 외부 네트워크가 잘 만들어져서 내게 의뢰가 들어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한마디로 삼박자가 다 맞아 떨어지니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다. 어려운 이론을 공부하는 것보다 이런 응용통계를 하는게 성격에도 맞고 더 재미있었다.
이렇게 안정기에 접어드니 그동안 뿌려놓은 씨가 싹을 터서 줄기가 자라고 마침내 열매를 따먹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평균 일년에 2-3편의 논문이 나왔었는데 아이오와로 돌아와서 평균 4-5편 가까이 나왔고, 안정기부터는 일년에 평균 7-8편 정도씩 나왔는데 예전보다 더 수월하게 이루어졌고 분야도 넓어졌다. 예를 들어 missing data model 의 개념을 바탕으로 multi-level model 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되자, 그걸 바탕으로 베이지안 모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었고, 베이지안에 대한 페이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샘플링 분야에서 베이지안 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는데 내가 missing data 연구를 하면서 우회하는 방식으로 드디어 베이지안 쪽으로 확장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또 일단 베이지안으로 들어오니 그 신세계에서 배울것도 많았고 또 내가 기여할 부분도 제법 보였다. (물론 고규형 교수와 같은 정통 베이지안과 협업을 시작하면서 더 수월해졌다. 독불장군 식으로 혼자서 일을 하는건 한계가 있다. )
내가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Fuller 교수의 제자로 훈련을 받고 베이지안 논문을 쓴다는 것은 마치 기독교 신학대학을 나온 목사가 예수의 산상수훈과 불교의 반야심경을 결합하여 설교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느냐가 중요했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공자나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것이라도 굳이 배척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